넷째날 강의
유일한 실체, 의식

1. 유일한 실체, 의식

변화시켜야 할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잠시 시간을 내어 지난밤에 말했던 것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한 여성분께서 제가 지난밤에 말했던 것 때문에 저를 어떤 국가에 대해 적대적이라고 느끼셨답니다. 저는 어느 국가에 대해서도, 어떤 인종에 대해서도, 그리고 어떤 믿음들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지 않기를 정말 바랍니다. 제가 만약 어떤 한 국가를 인용했다면 그건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했던 것뿐입니다.

제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우리는 우리가 마음속에 품은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증오를 품으면 그와 비슷한 모습으로 우리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마음속에 사랑을 품는다면 사랑 역시 그와 비슷한 모습으로 우리를 변화시킬 겁니다. 지난밤 뉴스 기사 하나를 인용했었는데, 우리를 비추고 있는 거울을 부숴버려서 우리의 모습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기사였습니다.

전쟁과 혁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거만함과 탐욕을 드러내던 사람들을 몰아냈을 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모습은 우리가 몰아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들처럼 돼 있습니다. 그래서 폭군을 몰아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그들이 몰아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폭군의 모습이 돼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위해서 다시 이 원리의 기본이 되는 것을 말해보겠습니다. 의식은 만물의 근원이자 유일한 실체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식 안에 존재하는 것만을 볼 수 있을 뿐, 그 외의 것을 볼 수는 없습니다.

증오란 것은 우리가 증오의 대상을 몰아낸 승리의 순간, 우리를 다시 배신합니다. 우리를 배신해서 우리는 우리가 비난했던 사람의 모습이 돼 있고, 비난의 화살은 다시 우리를 겨냥해 있습니다. 모든 승리라고 불리는 것들은 승자와 패자의 위치를 바꿔놓아서 승자를 패자의 위치로 옮겨놓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단점이 있기 때문에 타인을 증오하는 겁니다. 인종들, 국가들, 종교 단체들은 수세기동안 근원적인 적의를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과 우리를 비슷한 형태로 변화시키는 것, 그것은 사랑의 본질인 것처럼 증오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한 나라의 국민들이 서로에게 하는 것처럼, 국가는 또 다른 국가에게 그렇게 행동합니다. 노예제도가 있는 나라가 다른 나라를 공격한다면, 그것은 다른 나라를 노예로 만들려는 속셈으로 공격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한 나라의 국민들 사이에 경제적으로 경쟁이 심하다면, 그 나라가 다른 국가와 전쟁을 치르는 목적은 다른 나라의 상권을 붕괴시키는데 있을 겁니다. 한 국가 내에서 일부 지배적인 사람들이 다른 국민들을 지배하려고 한다면, 그들이 다른 국가와 전쟁을 벌이는 이유는 그 나라를 지배하려는 욕망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 안의 영상과 느낌을 생생하게 가짐으로써 주변 세상에 영향력을 미칩니다. 그러나 이 3차원 세상에서 시간이란 것은 느리게 흘러갑니다. 그래서 안에 놓여 있는 마음과 바깥에 놓여 있는 눈에 보이는 세상 사이의 관계를 보지 못합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이 제 말 뜻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원하는 이상을 생각하고 그것과 사랑에 빠짐으로써, 그 이상처럼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싫어하는 것을 마음에 품고 그것들을 비난한다면, 오히려 싫어하던 그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런데 3차원 세상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속에서 계속 품었던 것이 정말 현실로 드러났을 때에도, 이전에 그것들을 좋아해서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다는 기억이나 혹은 그것들을 싫어해서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다는 기억을 잊어버립니다.

오늘 배울 내용은 성경의 핵심이니 집중해주십시오. 성경에서 묻고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마태복음 16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알다시피 성경의 모든 내용들은 바로 여러분의 이야기이고, 성경의 인물들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시공간 속에 존재했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도 아니고, 지구 위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도 아닙니다.

2. 마태복음: 내가 그임을 믿지 않는다면

오늘 살펴볼 마태복음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그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아들인 나를 무엇이라고 하더냐? [마태복음 16:13]

그러자 그들은 말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세례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 혹은 선지자들 중의 하나라고 하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니, '그러나 그대들은 내가 누구라고 말하느냐? '라고 하시더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당신께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나이다'라고 말하더라."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시어, '시몬 바요나, 너는 은총 받았다. 살과 피가 너에게 그것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가 그것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니라'고 말씀하시더라."

"그리고 나는 그대에게 말하니, '그대는 베드로이다. 그래서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지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16:14-18]

이 이야기에서 예수가 그의 제자들(disciples)에게 고개를 돌리는 장면은 인간이 명상 속에서 자신의 훈련된(disciplined) 마음에 시선을 돌리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무엇이라 말하는가? " 우리에게 맞게 고치면, "나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대답합니다. "어떤 이들은 요한이 다시 돌아왔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고 하며,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라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고대의 선지자가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여러분을 과거의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거나 위대한 사람들과 닮았다고 하면 굉장히 우쭐거리게 됩니다. 그러나 깨어난 이성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진리에만 신경을 쓰기 때문에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그러나 그대는 나를 무엇이라 말하는가? "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누구지? "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는 겁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정도로 확신에 차 있다면, 그 대답은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일 겁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 사실을 느끼고 이렇게 살아갈 때,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겁니다. "살과 피는 이렇게 말하지 못하였다. 오로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이 나에게 그것을 나타내주셨다." 그리고는 이런 자아에 대한 관념을 반석삼아 나의 세상인 나의 교회를 세울 겁니다.

"내가 그(He)임을 그대가 믿지 않는다면, 그대는 그대의 죄 안에서 죽을 것이다." [요한복음 8:24]

의식만이 유일한 실체이기 때문에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모습은 변화하지 않은 채 그대로 유지될 것이고, 자신이라고 규정한 한계 속에 갇힌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기댈 곳을 찾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실패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르치고 있는 이 진리는 실패에 대해 어떤 변명거리도 주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념만이 삶의 모든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부에서 먼저 변화가 찾아와야만 합니다. 바깥세상에서 변화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부 세상이 바뀌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 자신만이 이 모든 환경들의 원인이라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때로부터 예수님의 제자들 중 많은 수가 돌아가서, 더 이상 그와 함께 하지 않더라. "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들도 떠날 것인가?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당신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 [요한복음 6:66-68]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유일한 실체이자 유일한 반석인 자신의 의식 안으로 고개를 돌려야 된다는 말을 들었다면 거부감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다른 이를 비난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자기 자신의 불행에 대해 사회를 비난하고, 저 너머의 것 때문이라고 하고, 다른 나라를 탓하고, 이렇게 사는 것이 더 쉽습니다. 자기 기분이 안 좋을 때면 날씨 탓을 하며 사는 것이 더 쉽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원인은 바로 자신이고 항상 내부의 상태에 따라 외부의 환경들이 형성되고 있다는 말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누구에게로 가야합니까? 받아들이기에는 힘든 듯 보이지만, 이 말들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라면 이 진리의 말씀을 향해 시선을 돌려야만 합니다.

3. 외부가 아닌 나에게 집중하기

이 법칙을 깊게 이해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주변의 사람들은 오로지 내가 내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내게 하는 행동들은, 단지 나 자신을 스스로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말해줄 뿐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여 그것과 함께 살아나간다면 마침내는 우리가 성경의 위대한 기도라고 부르는 것에 도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말합니다.

"당신께서 나에게 하라고 주신 일들을 끝냈나이다. " [요한복음 17:4]

"그리고 이제, 오 아버지시여, 세상이 있기도 전에 그대와 함께 있었던 영광을 가진 그대 자신의 자아와 함께 저를 영광스럽게 하소서. " [요한복음 17:5]

"세상에서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저는 그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켰나이다. 저에게 주어진 것들은 제가 지켜서, 어떤 것도 잃지 않았나이다. 오로지 잃은 것이 있다면 멸망의 아들뿐입니다. " [요한복음 17:2]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신의 질서 안에서는 어떤 것도 잃는 것이 없으며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잠시 꽃 피웠던 작은 꽃조차 영원히 피어 있습니다. 지금 한계 속에 둘러싸인 여러분의 시선은 그것을 볼 수 없지만, 존재의 더 넓은 차원 속으로 들어가면 영원히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볼 수 있을 겁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그대의 이름 안에서 지켰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도 잃은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멸망의 아들만을 잃었습니다. 멸망의 아들은 '잃는다는 믿음'을 뜻합니다. 아들은 생각이자 관념입니다. 멸망(Perdido)은 잃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유일하게 잃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잃는다는 믿음뿐입니다. 어떤 것도 잃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고 있는 천상의 영역으로부터 내려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다 낮은 의식 속으로 내려오면 천상의 영역에 존재했던 것들은 자신의 시야로부터 사라집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말할 겁니다. "나는 건강을 잃었어. 나는 재산을 잃었어. 나는 지위를 잃었어. 나는 믿음을 잃었어. 나는 많은 것들을 잃었어. " 그러나 한 번 존재했던 것들은 그 존재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더 낮은 수준의 의식으로 내려오면서 위에 존재했던 것들은 자신의 시야로부터 사라집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그것들이 사라져버렸어. 그것들은 내 세상 안에서 끝나버렸어. " 우리가 다시 할 일은 그것들이 영원히 존재하는 높은 곳까지 의식을 끌어올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시 한번 세상 밖으로 나타나게 하고 자신의 세상 안에서 현실로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17장의 핵심은 19절에 있습니다.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신성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신성함을 얻게 하려 함이다. " [요한복음 17:19]

이전에는 노력으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먼저 제 자신을 바꾸지 않는 한, 타인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 안의 세상 속에 존재하는 타인을 바꾸려면 그 사람에 대해 내가 지닌 관념을 먼저 바꿔야만 합니다. 최선의 방법은 자신에 대한 관념을 바꾸는 겁니다. 다른 이들을 볼 때, 자아에 대해 갖고 있는 나의 관념이 비추는 대로 그들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관념이 고귀하고 고결하다면, 다른 이들에게서 고귀하지 않은 것들을 볼 순 없었을 겁니다.

다른 이를 변화시키기 위해 그 사람과 논쟁을 하거나 싸우지 말고, 단순히 의식 속에서 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십시오. 그러면 자신의 자아는 변화될 것이고 자연히 다른 이들도 변화될 겁니다.

4. 나는 만물의 포도나무이자, 길이다

"변화시켜야 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오로지 자신의 자아밖에 없다. " 자아는 간단히 말해 여러분의 의식이자 인식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그 자아가 사는 세상이 결정됩니다. 우리가 유일한 실체로서 시선을 향할 곳은 의식입니다. '의식이 전부이고 모든 것들은 의식'이라는 명제만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모두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더라도 여러분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라고 제안할 때, 현실의 도피처에 대해 말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원하는 것들이 정말 이루어졌다면 현실에서 일어날 만한 일을 느끼고 마음속에서 그것을 현실처럼 느낀다면, 상상했던 것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형체를 굳혀갈 겁니다. 우리가 사실로 받아들인 것이 이미 객관적이고 단단한 실체로 형체를 띄고 있는 수준까지 올라가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다른 이들을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을 신성하게 해서, 그렇게 함으로써 타인을 성스럽게 합니다. 순수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들이 순수하게 보입니다.

"그 본연의 속성상 깨끗하지 않은 것들은 없더라. 그러나 깨끗하지 않다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그것들은 깨끗하지 않은 것이다. " [로마서 14:14]

본질적으로 깨끗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오직 여러분 자아의 관념에 의해서 깨끗한 것인지, 깨끗하지 않은 것인지가 구별될 뿐입니다.

"나와 나의 아버지는 하나이다. " [요한복음 10:30]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를 믿지 말지어다. " "그러나 만약 내가 아버지의 일들을 한다면, 그대가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을 믿으라. 그대는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믿게 될 것이다. " [요한복음 10:37, 38]

예수는 하느님과 자신을 하나로 만들었고, 그렇게 하는 것을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에 있어 이상한 것으로 생각하거나 신성에 대한 도전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맺는 열매가 달라집니다. 배나무에서 배가 열리고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고, 사람의 경우에도 자신 내부의 모습이 비추는 대로 삶의 환경을 만드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이고, 그대들은 가지들이다. " [요한복음 15:5]

가지가 포도나무에 뿌리를 두지 않으면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열매를 바꾸고 싶다면 포도나무를 바꾸어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저의 세상 안에서 여러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저에게 뿌리내려 있고, 마치 포도나무의 열매가 그 증거를 가져오는 것처럼, 여러분은 저라는 포도나무의 증거를 가져옵니다. 여러분의 의식을 제외하면 실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지금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은, 그리고 여러분 세상에 있는 환경 속에서 변화를 일궈내기 위해 해야 할 일은 고요하게 지금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단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길을 통해 여러분은 그 모습이 될 겁니다. 이 세상을 바꾸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나는 길이다(I am the way)."

즉, 나의 IAMness, 나의 의식은 나의 세상을 바꾸는 길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관념을 바꾸면 세상이 바뀝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훼방 놓는다면, 우리를 방해하고 있는 그 사람은 단지 우리의 관념 안에 써놓은 그대로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자동적으로 했던 것뿐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들이 맡은 역할을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바로 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모습을 먼저 그렇게 변화시켜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은 변합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한 여러분의 것 중, 선물로 줄 수 있는 것은 여러분 자신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변하길 원하는 모습으로 여러분이 먼저 변화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은 절대 그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그대가 그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대는 그대의 죄 안에서 죽을 것이다. " [요한복음 8:24]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그 어떤 분도 같은 세상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오늘밤 우리는 자신의 세상으로 뻗어있는 집으로 갑니다. 완전히 다른 세상 안에서 방문을 걸어 잠급니다. 다음날 일어나 일터로 갑니다. 그곳에서 서로를 만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정신세계, 다른 물질세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 자신만을 유일하게 선물로 줄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은 완벽하지 못하면서 세상이 완벽하길 바란다면, 내가 완벽하기 전까지는 세상을 완벽하게 볼 수 없다는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실패할 겁니다.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면 세상에서 완벽함을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이 완벽해지는 날이 오면, 자신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에 세상을 아름답게 봅니다.

"순수한 자에게는 모든 것들이 순수하다. " [디도서 1:15]

제가 여기서 똑같은 말을 여러분들에게 하고 있지만, 똑같은 내용을 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제가 말하는 것을 여러분 자신을 통해서 듣는 겁니다. 여러분의 선입견들, 미신들, 그리고 자아에 대한 관념들을 통해 걸러져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존재이든 간에, 이 메시지는 여러분을 통해 주어지고 여러분에 의해서 채색됩니다.

여러분이 저를 다른 모습으로 보기 원한다면, 그래서 여러분의 베데스다 연못이 흔들린다면 제가 변하길 원하는 모습으로 여러분이 먼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변했으면 하는 모습으로 먼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나 먼저 변하지 않는다면, 타인이 그런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을 기대할 순 없습니다.

여러분의 의식과 저의 의식은 세상의 유일한 반석입니다. 성경에서는 베드로라고 말합니다. 인간 베드로가 아닌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누구에게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요한이 다시 왔다고 사람들이 말해도 우쭐거리지 않는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가리켜 세례요한이 다시 왔다거나 예레미야 혹은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다시 왔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굉장히 우쭐거리게 만들 겁니다. 그때 나는 사람들의 아첨하는 소리에 귀를 닫고는 자신에게 묻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내가 누구지? "

태생적인 한계, 환경적인 한계와 나를 단순히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몸으로 규정짓는 잘못된 관념을 거부하고, 내 안의 그리스도가 바로 나임을 느껴 이 느낌이 내 안에 자리를 잡아서 에너지의 자연스러운 중심부를 차지할 때까지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여 유지합니다. 그러면 어떤 의도나 노력 없이도, 이 완벽함은 마음 안에 품어져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며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고, 듣지 못하는 자의 귀를 열게 하고, 슬픔에 기쁨을 주고, 보잘것없는 것들에게 아름다움을 줄 때, 오로지 그때만이 진정으로 포도나무를 내부 깊숙이 박아놓을 수 있습니다. 그런 기적들은 여러분이 진정으로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자연스럽게 이루어낼 일들입니다. 그(He)는 그의 행동으로 그리스도임을 나타냅니다.

우리 의식이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뀔 때 겪는, 그런 평범한 잠시간의 의식의 변화는 진정한 변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변화는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상태로 순식간에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져서 마음속에서 그 믿음과 모순되는 것들을 쫓아낼 정도가 되면 존재의 중심에 습관처럼 배인 생각이 우리의 존재를 명확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진정한 변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즉 깨어난 이성은 사람들에게 끌려온 여인에게서 어떤 불순한 점도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그녀에게 말합니다. "그대에게 죄를 묻는 자들이 없지 않느냐? " [요한복음 8:10]

"그녀가 말하기를, '주여, 아무도 저에게 죄를 묻지 아니하였나이다. ' 그러자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나 역시 너에게 죄를 묻지 않노라. 가라 그리고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거라. '" [요한복음 8:11]

아름다운 존재는, 그 앞에 어떤 것을 가져다 놓아도, 오로지 아름다움만을 봅니다. 예수도 아름다운 것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불결한 것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리스도가 된 것을 인식하게 되면 우리 역시 병들어 굽어진 팔을 곧게 만들고, 인간들의 죽은 희망을 부활시킬 겁니다. 나를 단순하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이라 생각하게 만드는 잘못된 믿음 속에서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해낼 것입니다. 이것은 확신에 차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인데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죽음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3차원 세상의 인간인 요한은 4차원 세상의 자아인 예수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자신은 참수를 당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3차원적인 시야를 잃게 됩니다.

자아의 개념이 확장될 때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생각들을 떠나보내면서 어느 정도 고통이 따릅니다. 깊이 박혀 있는 생각들은 습관적으로 받아들인, 한계로 둘러싸인 자궁 속에다가 우리를 붙잡아 놓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껏 믿어왔던 것들을, 이젠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우리의 의식 바깥에는 어떤 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시선을 더 이상 자아의 외부로 향하지 않습니다.

의식 이외의 것들에 힘이 있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유일한 실체는 하느님이고 하느님은 다름 아닌 여러분의 의식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생각을 반석 삼아서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교회를 짓고, 여러분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 태어난 신성한 존재란 사실을 확신을 갖고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요람에서도 주어지지 않았던 자아에 대한 관념,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도 만들어지지 않았던 자아에 대한 관념, 인간의 힘의 영역을 벗어난 곳에서 품어진 자아에 대한 관념을 감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여러분은 스스로의 힘으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로 아름답게 표현되었습니다. 두 아들 중 한 명은 이삭으로 인간의 힘의 영역을 벗어나 태어났고, 다른 한 명은 이스마엘로 노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임신하기에는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방랑자인 여종 하가와 정을 맺습니다. 하가는 아브라함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이스마엘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대적이었고, 모든 사람들도 그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은 그들이 영국의 왕실에서 태어나든 백악관에서 태어나든 아니면 어떤 굉장한 곳에서 태어나든, 모두들 주어진 환경들에 갇혀서 태어난, 속박 속에서 태어난 아이입니다. 이처럼 여인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성경에서 하가의 아들인, 이스마엘로 상징됐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잠에 들었다면 축복받은 이삭이 됩니다. 이삭은 인간 능력의 영역을 넘어 태어났고, 오로지 믿음을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이 둘째 아이는 육체적인 아버지가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태어난 겁니다. 과연 무엇이 두 번째의 태어남입니까? 저는 인간이기에 다시 어머니의 자궁 안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의 태어남이 일어나야만 한다고 합니다.

"한 인간이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 [요한복음 3:3]

어떤 남자도 줄 수 없는 것, 어떤 여인도 줄 수 없는 것, 저는 그것을 고요히 제 것으로 만듭니다. 다시 말해 제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확신에 차서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이것은 약속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때야 저는 축복받을 수 있고 이삭이 될 수 있습니다.

축복받은 존재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제 자신도 할 수 있기 시작할 때, 이스마엘의 속박을 넘어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왕국의 상속자가 됩니다. 이스마엘은 그의 아버지가 아브라함, 즉 신인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상속받지 못했습니다. 이스마엘의 부모님 모두가 신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하가는 노예였기에 아버지의 재산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이자 사라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의식 안에 갇힌 채 자신을 알아차려 주기를 기다리는 이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그를 이삭이라 말하고 신약에서는 예수라 말합니다. 둘 다 인간의 도움 없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 누구도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해주지 않고, 그 누구도 여러분이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거나 확신시켜주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각을 항상 간직해야 하고, 여러분이 만약 하느님이 된다면 어떨 것인지 궁금해해야 합니다. 의식이 전부이고 '모든 것은 의식'이라는 명제 외에는 일어나는 현상들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것도 자신을 통해서 나타날 수 없습니다. 구하고자 하는 이상이 마음 안에서 잠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절대 우리를 통해 나타날 수 없습니다.

5. "서치"에 나온 경험

제가 2년 전에 출간한 '더 서치(THE SEARCH)'에 나와 있는 저의 경험을 지금 다시 한 번 말해서, 강조해보고자 합니다. 이 책은 의식의 법칙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여러분 의식 안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변화시킬 사람은 외부에 없고 오로지 자신의 자아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바닷가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는 "완벽한 상태"에 대해 명상을 하면서, 제가 바라보는 시선이 굉장히 순수해져서 어떤 부정한 것도 보이지 않고, 모든 것들이 순수하게 다가오고, 어떤 것도 비난하지 않는다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봤습니다. 이 생각을 강렬하게 해서 그 속에 푹 빠지게 되었을 때, 제가 감각이라는 어두운 것들 위로 고양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몸이 공기가 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느낌은 강렬했습니다. 그때 죽음과 싸워 이긴 승리자들의 찬양소리와 함께 천국의 합창 소리와 같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깨어났다. 그는 깨어났다. " 그리고 직관적으로 그들이 나를 두고 하는 말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후에 제가 밤길을 걷는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곧 눈먼 자, 절름발이, 죽어가는 자 등 병이 깊은 많은 자들이 모여 있는 고대의 베데스다 연못과 같은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통처럼 물이 흔들리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다가가자, 제가 어떤 생각이나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차례대로 아름다움의 마법사가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그들이 변해갔습니다. 완벽함이 제 안에서부터 솟아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것과 조화를 이루어 그들의 눈, 손, 발 등 그들에게 없던 부분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저장고로부터 나와서는 그들을 완벽하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되었을 때 합창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끝났다. "

완벽함이라는 생각에 대해 집중된 명상을 했기 때문에 이런 영상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음속에서 응시한 완벽함은 그것과 저를 계속해서 하나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영상이 저에게 나타났습니다. 저는 완벽한 생각들에 완전히 흡수되어 잠시 동안 마음속에서 응시한 것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나와 하나가 된 고귀한 목적들이 그와 같은 부류의 것들을 끌어당겨서, 제 내부의 마음이 비추는 것과 같은 영상들을 창조했습니다. 우리와 하나가 된 이상은 연상 작용으로 수천 가지의 분위기를 깨워서 그 생각이 중심이 된 비전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신비한 경험을 통해, 우리가 추구하는 완벽함이란 것은 우리 자아에 대한 변형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아를 변형시키는 것에 성공했을 때, 눈앞에서 이 세상은 마법처럼 녹아버립니다. 그리고 우리의 변형된 모습이 비추고 있는 것에 맞추어, 세상은 스스로를 다시 재건합니다.

우리가 마음속의 영상과 마음속의 느낌을 강렬하게 가짐으로써 우리는 주변의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자아에 대해 지니고 있는 관념에 좌우해서 우리의 삶을 빛나게 할 수도 있고 어둡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념 외에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내부의 차원적으로 더 위대한 자(dimensionally greater One)인, 깊은 곳의 관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돕거나 방해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돕거나 방해한다는 사실을 알든 모르든, 우리의 마음에 맞춰 세상을 만들고 있는 의식의 법칙에 종속된 자들입니다. 자아에 대한 관념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물질적인 매개체를 쓰긴 하지만, 우리를 자유롭게 하거나 속박 속에 가두는 것은 우리 자아에 대한 관념입니다.

마음의 상태가 비추는 대로 외부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이 삶이라면, 완벽함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우리 자아를 변화시키는 길밖에 없습니다. 외부에서 도움을 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눈을 들어서 우러러보고 있는 산도 나의 내부에 존재하는 마음 안의 산입니다. 그래서 모든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체이자 유일한 기초로, 우리가 시선을 향해야 하는 곳은 우리 자신의 의식입니다.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것만을 외부세계에 가져다주는 이 법칙의 정의에 완벽하게 기대야 합니다. 우리 자아에 대한 관념을 바꾸지 않고 세상을 바꾸려 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겁니다. 내부의 변화가 일어나기 전까지 외부는 변화하지 않습니다.

"내부에서와 같이 외부에서도(As within, so without)."

제가 여러분에게 물질적인 방법과 투쟁을 통해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하기 보다는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어 있는 것처럼 상상해야 하고 정신적으로 위대한 환경 속에서 살라고 말했을 때, 그 말들은 현실에 무관심한 인생관을 가지라는 것은 아닙니다. 의식을 변화시키지 않고 어떤 일을 하려 한다면, 겉에 보이는 문제만을 다루는 무익한 짓일 뿐입니다. 아무리 외부적으로 애쓰고 노력해봤자 자신의 자아 관념이 규정하고 있는 것만을 받게 됩니다.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에 반응한다는 것은 우리 존재의 법칙에 대항하는 것이고 운명의 지배자가 되는 길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내 삶의 환경들은, 존재의 차원적으로 더 넓은 창고에서 영혼이란 것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아관념에 의해서 삶의 환경들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삶에 어떤 고통이 주어졌다면 그 원인을 찾기 위해 내부로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아관념이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와서 고통을 겪게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상적인 감정을 가지려 한다면, 쉽게 증오의 감정 속으로 내려갔던 것처럼 쉽게 이상적인 감정 상태로 솟아오를 수 있습니다. 사랑과 증오는 마법 같은 변화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랑이나 증오의 감정을 가지면, 우리는 마음속에 응시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증오라는 감정에 마음을 모으면, 우리가 적으로 생각했던 것들의 성격을 우리 안에 만들어냅니다. 또 어떤 상태든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에, 벗어나고 싶은 상태에 대해 직접적인 공격을 하기보다는, "보잘것없는 것들에게 아름다움을, 슬픔에 기쁨을" 마음 안에 그려서 불쾌한 상태를 씻어내는 것이 최선입니다.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들과 듣기에 좋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라. "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것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변화되기에 그렇습니다.

외부에서 변화시킬 사람은 없고 오로지 자신의 자아만이 그 변화의 대상입니다. 자아를 변형시키는 데에 성공한다면, 현재의 세상은 분해돼버렸다가 변형된 자아가 말하고 있는 것에 맞추어 다시 형태를 취합니다. 의식이 하강하게 된다면 내가 보고 있는 불완전함이 나타납니다. 신성한 질서 속에서는 어떤 것도 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그 본연의 생명을 지니고 있는 곳에서, 의식이 하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잃는 것이 없습니다.

"이제, 아버지시여, 세상이 있기 전에 제가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그 영광으로 저를 영광스럽게 하소서. " [요한복음 17:5]

의식 안에서 위로 솟아오르게 되면 원래 나의 것이었던 힘과 영광이 다시 돌아오게 되고, 그때 이렇게 말하게 될 겁니다. "당신께서 하라고 주신 일들을 끝냈습니다. " 그 과업들은 의식이 하강한 곳으로부터, 즉 내가 인간의 자식이었다고 믿는 곳으로부터,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고, 나는 하느님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천상의 세계로 돌아가는 겁니다.

6.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과업

의심할 여지없이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과업은 자신의 관념을 위대함으로 채우고 그것을 계속 유지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이미 이룬 것처럼 걸어 나간다면, 그렇게 사실로 받아들인 곳까지 솟아오르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세상을 만드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이미 그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도 않을 겁니다. 항상 그것들은 존재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수준까지 의식 안에서 내려왔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내려왔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불완전함이 가득합니다! 비록 우리의 몸은 3차원 세상 속, 여기 이렇게 있지만, 의식이 솟아오르기 시작하면 여전히 이곳에 살고 있는 동안에도 전혀 다른 환경 속으로 옮겨가고, 전혀 다른 친구들과 전혀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는 세상 안에 있는 것이지, 세상의 일부가 아니다. "라는 굉장히 위대한 선언을 들어봤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환경을 바꾸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상태와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굉장히 순수해져서 어떤 부정한 것도 보이지 않고 모든 것들이 순수하게 다가오면서 어떤 비난도 하지 않는다면 어떤 느낌이겠습니까? 그 이상적인 상태를 생각하고 그것과 하나가 된다면, 그리스도로서 여러분 본연의 생명을 가진 곳까지 올라가게 될 겁니다.

세상이 존재하기도 전에 존재했었던 상태 속에서 여전히 여러분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추락해버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아에 대한 관념일 뿐입니다. 아무런 흠도 없는 것을, 여러분은 깨져버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 뒤틀린 눈을 통해서 사물들을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괴한 모습으로 보이게 하는 거울 앞에 서서 길쭉한 모습의 자신을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둘은 같은 사람입니다. 아니면 크고 뚱뚱하게 보이는 거울 앞에서 그 비춰진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자신이 인식하는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 왜곡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완벽함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노십시오. 누구에게도 도와달라고 하지 말고, 대신에 요한복음 17장의 기도가 바로 여러분의 기도가 되게 하십시오. 세상이 존재하기도 전에 여러분의 것이었던 것들을 가지십시오.

"멸망의 아들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잃은 것이 없다. "는 말이 담고 있는 진리를 깨달으십시오. 나의 신성한 산에서는 어떤 것도 잃게 되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잃는다는 믿음, 즉 멸망의 아들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나는 나 자신을 신성하게 하나니, 그들도 진리를 통해 신성해지리라. " [요한복음 17:19]

그 누구도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자아만 바꾸면 됩니다. 이 세상 모두를 신성하게 바꾸는데 필요한 것은, 오직 여러분 자신을 신성하게 만드는 것뿐입니다. 마음의 눈 안에서 여러분 자신이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확고히 한다면 아름답지 않은 것들은 더 이상 여러분의 시야에 존재하지 못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진리는 세상 어떤 지식보다 값어치 있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지켜내는 데에 용기, 아주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오늘밤 이 진리를 듣고도 여전히 자신이 곤경에 처하게 되면 다른 사람을 비난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유일한 실체로 자신의 의식과 자기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린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겁니다. 다음 말들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나를 보내주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신다면, 그 누구도 내게 올 수 없다. " [요한복음 6:44]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 [요한복음 10:30]

"하늘에서 주신 것이 아니라면, 인간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더라. " [요한복음 3:27]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니, 이는 나의 생명을 다시 얻기 위하여 나의 생명을 내려놓기 때문이더라. "

"아무도 나에게서 생명을 뺏을 자가 없으나, 나는 그것을 스스로 내려놓는다. " [요한복음 10:17,18]

"그대는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내가 그대를 선택했다. "

나 자신에 대한 관념이, 그 관념에 맞추어 세상을 만들고 사람들을 이끌어, 그들의 행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자아에 대한 관념입니다. 주변의 환경들과 삶의 조건들 그리고 사람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십시오. "나는 누구인가? " 여러분이 싫어하는 대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겁니다.

여러분이 스스로를 죄가 있다고 비난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누구도 여러분을 비난하지 않을 겁니다. 이상을 인식하면서 산다면 어떤 비난할 것도 찾지 못하게 될 겁니다. "순수한 자에게는 모든 것들이 순수하다. "

7. 기도의 방법 정리

자, 이제 잠시 시간을 내서 제가 개인적으로 기도를 할 때 어떻게 하는지 그리고 저의 세상 속에서 변화를 불러일으키길 원할 때 어떻게 하고 있는지, 가능한 한 명쾌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굉장히 흥미롭고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여기 계신 누구라도 이 법칙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간단해서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법들은 따라하는데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것을 하기를 원해야만 합니다. "어 좋아. 한번 해볼까. "라는 마음 상태를 가지고는 해낼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원해야만 합니다. 행동을 하게 만드는 큰 동기는 욕망입니다.

욕망이란 것은 모든 행동들을 이끌어내는 큰 동기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목적을 뚜렷이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다른 곳에 가기를 원한다고 해봅시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정말로 다른 곳에 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 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갈 필요도, 앉을 필요도, 아무것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눈을 감은 채, 가고 싶은 곳에 실제로 가 있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는 이것들이 현실처럼 느껴질 때까지 이 상태를 유지하세요. 내가 지금 다른 곳에 있다면 지금 여기서 보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볼 순 없습니다. 어떤 공간 속에 나를 놓았느냐에 따라, 세상은 나와의 관계 속에서 변합니다.

그래서 저는 눈을 감은 채 이대로 서서, 제가 원하는 곳에 있었다면 보았을 것들을 봅니다. 그것이 충분히 실제처럼 느껴질 때까지 유지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이 방의 벽을 만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눈을 감고 고요해진다면 그것들을 만져보는 것을 상상할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서 여러분의 손이 그 벽을 만지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벽을 만진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벽에 손을 대보고 문질러서 벽의 나무를 느껴보십시오. 이 자리를 뜨지 않고도 여러분이 그렇게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충분히 고요해지고, 충분히 집중되어 있다면 현실처럼 상상할 수 있고 실제로 벽을 만진다고 느끼게 될 겁니다.

저는 이 자리에 그대로 서 있으면서 마치 제가 지금 그곳에 있는 것처럼, 그때 보기 원하고 육체적으로 가기 원하는, 제 눈앞에 펼쳐질 세상만을 허락합니다. 즉, 그곳에 있다는 것을 사실처럼 생각하는 것을 통해 다른 장소를 바로 이곳으로 가지고 옵니다. 이해되셨습니까? 저는 눈앞의 장면들이 스스로 일어나게 할 뿐 그것들이 일어나게 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단순히 제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상상한 후에 그것들이 스스로 일어나도록 합니다. 어떤 사람을 원한다면 그가 여기 서 있는 것을 상상하고 만져봅니다. 성경에서 이 구절을 찾았습니다. "그는 그들 위에 손을 얹고 만졌다. "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다면 여러분은 자연스럽게 어떤 느낌이 떠오르겠습니까? 손을 그에게 갖다 댈 거라고 확신합니다. 친구를 만나서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든가 그의 어깨에 손을 갖다 댈 겁니다.

여러분이 굉장히 좋아하는 친구를 1년 만에 만났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행동을 하겠습니까? 아마 그를 껴안을 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그의 손을 꼭 잡을 겁니다. 여러분은 상상 속에서 그의 손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오게 한 후, 그를 단단한 실체로 느낍니다. 행동을 단지 이것으로만 한정시키십시오. 그렇게 해본다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놀라게 될 겁니다. 그때부터 주변의 것들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의 차원적으로 더 거대한 자아는 그와의 육체적인 만남을 가져오게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생각과 행동들을 불러일으킬 겁니다. 그렇게 법칙은 작동합니다.

저는 매일 잠과 비슷한 상태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굉장히 쉽습니다. 그렇지만 습관이란 것은 인간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겁니다. 그것은 법칙이 아닌데도 마치 세상에서 가장 거부할 수 없는 법칙처럼 작용합니다. 우리는 습관의 산물입니다. 여러분이 매일 일정한 시간에 잠과 비슷한 상태 속으로 들어가본다면, 예를 들어 그 시간이 오후 3시라고 말해보면, 매일 그 시간만 되면 잠과 비슷한 상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한 번 일주일 동안 시도해보십시오. 그리고 제가 옳았는지 틀렸는지 확인해보십시오.

졸린 듯한 잠과 비슷한 상태를 만들기 위해 우선 자리에 앉습니다. 졸음을 너무 멀리 쫓아버리지 말고, 충분히 이완되고 생각의 방향을 조절하기에 충분할 만큼만 졸음을 쫓아내십시오. 일주일 동안 매일 일정한 시간에 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고 있든지, 이 시간만 되면 눈을 뜨고 있기 힘들어질 겁니다. 이제 그렇게 자유로워지는 시간이 언제인지 안다면 그때 창조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연습을 가볍게 취급하지 마십시오. 그랬다간 원하지 않는데도 이 시간만 되면 굉장히 졸음이 올 수 있습니다.

이것 외에 다른 기도의 방법이 있습니다. 우선 상상하기 편안한 안락의자를 준비하셔서 앉거나, 땅에 등을 대고 누우신 후에 아주 편안하게 긴장을 풀어줍니다. 자세가 편안해야 하고, 압박을 느끼는 자세는 피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자세를 만듭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것이 기도의 시작입니다. 다음으로 여러분의 바라던 것이 실현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단순하고 작은 사건을 마음의 눈 안에서 구상하십시오. 저는 항상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따라올 수 있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마음이 자유롭게 배회하게 한 후에, 가장 그럴듯한 것을 하나 골라냅니다. 악수를 한다든가, 사람과 포옹을 한다든가, 편지를 받는 것이라든가, 수표를 쓰는 것과 같은 바람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단순하면서도 작은 일을 골라냅니다.

바라던 것이 실현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장면을 결정한 후에 여러분이 잠과의 경계선에 들어가는 것을 돕기 위해 아주 편안한 의자에 앉거나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후에 눈을 감습니다. 이제 편안함을 느끼는 졸린 상태, 즉 마음이 모아진 침착한 상태를 느낍니다. 그 상태는 원한다면 움직일 수 있지만 움직이는 것을 원하지 않고, 원한다면 눈을 뜰 수 있지만 눈 뜨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상태입니다. 만약 이런 느낌을 갖는다면 성공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완벽한 상태에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라면 세상 어떤 것도 느끼기 쉽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성취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단순하면서도 작은 그리고 한정된 행동을 고르신 후에, 그것을 느끼거나 아니면 그 행동을 연기하십시오.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마치 배우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연기하는 것처럼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뒤로 물러나 앉아, 여러분이 하고 있는 것을 그리고 있으면 안 됩니다. 직접 그 배역을 맡아 행동을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몸을 움직이라는 것이 아니라, 육체 안의 더 위대한 자아가 나와서 구상했었던 행동들을 실제로 하고 있다고 상상하십시오. 걷는 것이라면 여러분이 걷고 있는 것을 상상하십시오. 여러분이 걷는 것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직접 걷고 있는 것을 느껴야만 합니다.

계단을 오르는 것이라면 여러분이 계단을 오르는 것을 느끼십시오. 여러분이 그것을 보고 있으면 안 되고 계단을 오르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어떤 사람과 악수하는 것이라면 악수하는 장면을 보아서는 안 되고, 내 앞에 사람이 있는 상상을 하신 후에 그와 악수를 하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여러분 육신의 손은 그대로 움직이지 말고, 상상 속의 손인 내부의 더 위대한 손이 실제로 그와 악수하는 것을 상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해야 할 일 전부입니다. 이것들은 여러분이 공상을 하는 듯 보이지만, 존재의 더 거대한 차원에서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3차원적 공간에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4차원적으로 그 일을 실제로 겪고 있는 중입니다. 4차원의 상태가 현실로 드러나기 위해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기도하는 방법 중에 세 번째는 단순히 감사함을 느끼는 겁니다.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이들을 위해서 어떤 것이 필요할 때,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잠과 비슷한 상태를 불러일으킨 후에 그 상태 속에서 행복함과 감사함을 느낍니다. 감사한 감정은 원하는 것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소원이 성취되었다는 느낌을 사실처럼 생각하고, 이 하나의 감정으로 마음을 채운 채 잠자리에 들어갑니다.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것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소원이 성취되었다는 느낌은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말한 모든 기도의 기법들을 사용할 수도 있고 그것들을 여러분의 취향에 맞게 바꿀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졸음이 오는 상태를 불러일으키라는 겁니다. 그 상태는 노력 없이 의식을 기울일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가는 데에 용이합니다.

또 성공적으로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하나의 감정만이 마음을 지배하도록 하십시오. 자,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면 어떤 기분을 느끼겠습니까? 어떤 기분일지 생각이 났다면 눈을 감고 그 하나의 감정 속에 빠져서, 그 상태에 푹 빠지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차원적으로 더 위대한 자아가 지금 이 순간에서 감정이 실현된 때로 이어지는 사건들 사이에 다리를 건설해 놓습니다. 이것이 해야 할 일 전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단순한 것의 중요성을 가볍게 여기는 습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습관의 산물입니다. 우리가 지금 배우는 것은 이전에 쌓아놓은 관념들을 씻어냅니다. 그러나 이전에 우리와 함께 했었던 관념들은 여전히 우리의 행동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여기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설명해줄 성경속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교차로로 가면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어린 망아지를 보게 될 것이니, 그것을 가지고 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왜 이 망아지를 데리고 가십니까? "라고 물으면, "주께서 그것이 필요하시다. "라고 대답하라고 시켰습니다. 제자들은 교차로로 가서 망아지를 발견했고 예수가 시킨 것처럼 그대로 했습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망아지를 예수에게 드리고 나니, 예수는 그것을 타고 승리의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망아지를 타고 다니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바로 이 이야기속의 예수입니다. 망아지는 여러분이 취하고자 하는 감정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길들여진 적 없는 야생의 것입니다. 열망하던 것이 이루어진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새로운 느낌일 겁니다. 마음을 훈련시키지 않았다면 그 새로운 느낌은 마치 어린 망아지처럼 타기 힘든 것이 됩니다. 만약 그 감정에 믿음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어린 망아지는 나를 내동댕이 칠 겁니다. 여러분이 이 감정에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인식할 때마다, 망아지에서 떨어질 겁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훈련시켜 그 고양된 감정에 믿음을 유지하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그것을 타고 승리의 기쁨으로 성취, 즉 평화의 도시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시오.

이 이야기는 유월절 축제를 치르기 전의 일입니다. 현재의 상태를 통과해서 이상적인 상태로 들어가려면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이것들에 믿음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최상의 것들과 함께 가기 위해서는 고양된 감정을 유지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확고한 마음태도와 이루어졌다는 느낌은 소망을 이루게 할 겁니다. 소망이 이루어졌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걸어 나가다가, 가끔은 정말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지 보려고 한다면 바로 그때 그 감정, 즉 망아지 등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베드로처럼 판단하는 것을 멈춘다면 물 위를 건널 수 있을 겁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기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분별하는 마음속을 들여다보게 되었을 때 물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그때 "위를 보라. 베드로! "라는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위를 보았고 다시 물 위로 떠올라 계속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현실로 드러나는지 확인하려고 내려다보는 대신, 이미 이루어졌다고 확신하며 그 감정을 유지하면, 길들여지지 않은 망아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망아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습니다.

특이한 것은 우리가 고양된 감정을 유지하면서 그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이 보호를 해준다는 겁니다. 그들은 종려나무 잎들을 내 앞에 깔아주어 우리의 여정을 보호해줍니다.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들이 이루어진 곳으로 옮겨간다면 그 충돌은 없을 겁니다. 나의 고양된 감정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에 맞는 생각과 행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고양된 감정을 유지하며 나아가면, 반대나 다툼이 없을 겁니다.

배운 것을 착실하게 따라서 해볼 때 가르치는 사람에 대해서, 즉 가르침에 대해서 진위여부를 가릴 수 있습니다. 저는 일요일 밤에 여기를 떠납니다. 이 가르침에 믿음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원인을 인간의 의식 밖에서 찾는다면, 그때는 여러분에게 의식의 실체를 이해시킬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실패에 대한 변명거리를 외부에서 찾는다면 항상 그 변명들을 찾고자 하는 곳에서 찾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구하고자 하는 것들은 항상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에 대해 변명거리를 찾는다면 하늘의 별에서도, 숫자들에서도, 이 찻잔 속에서도, 그 어떤 것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실패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것들 속에서 찾고 있을 뿐, 실제로 그 변명들은 그곳에 없습니다. 성공한 사업가와 전문가들은 이 법칙이 작용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법칙은 잡담이나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용기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될 겁니다.

인간의 끝없는 여정의 목적은 바로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 하나입니다. 인간은 아버지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왔습니다. 사랑스러운 것들, 칭찬받을 만한 것들, 그런 모든 것들을 통해 아버지가 나타납니다. 무엇이든 아름다운 것들에 집중하고, 이 세상의 불완전한 것들에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유일한 실체를 인식하고 있는 여러분의 의식, 여러분의 IAMness, 여러분의 인식에 대한 진리에 믿음을 유지하십시오. 그것은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설명할 수 있는 기반입니다. 이것 외에는 어떠한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의식이 전부이고 모든 것들은 의식이라는 명제를 제외하고는,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 어떤 것도 명확한 원인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구하고자 하는 것들은 이미 여러분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그것을 끌어낼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 잠재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끄집어낼 정도로 시간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세상 안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들을, 이미 눈에 보이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들에 믿음을 유지해서 간단하게 현실로 불러냅니다. 그러면 그것들은 현실로 드러날 겁니다. 아버지는 소망을 실현할 수 있는 수없이 많은 방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마음 안에서 확고히 하고 항상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사실로 받아들인 것, 그것이 지금은 거짓일지라도, 계속 고집한다면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버지는 하나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과거에 존재했던, 현재 존재하는 그리고 앞으로 존재하게 될 모든 것입니다. 따라서 이미 여러분은 구하고자 하는 그것입니다. 그것들은 여러분에게서 떨어져 있지도 않고 심지어는 가깝게 있지도 않습니다. 가깝다는 것도 분리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파스칼은 말했습니다. "그대가 이미 나를 찾아내지 못했더라면, 그대는 나를 찾으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

여러분이 지금 열망하는 것, 여러분은 그것을 이미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미 그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것을 구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것들을 소망의 형태로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세상 안에서 실체라고 느끼는 것들처럼, 소망이라는 형태로 느껴지는 것들도 그와 같은 실체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구하고자 하는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을 현실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다른 누구도 바꿀 필요가 없고 오로지 자신만을 변화시키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