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날 강의
의식의 법칙과 소망의 성취

1. 의식의 법칙과 소망의 성취: 기도의 본질과 실천

생각에 믿음을 유지하라

오늘 밤 이 강의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그동안 배운 내용을 간략히 정리한 후, 많은 분들이 요청하셨던 세 번째 강의 주제인 4차원적 사고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누군가가 어떤 주제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했다면, 그것에 대해 이야기도 잘 하게 될 것이고 설명도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지난겨울 바베이도스에서 한 어부가 얼마되지도 않는 어휘를 가지고 돌고래의 행동들에 대해 약 5분 남짓 설명했는데, 셰익스피어가 그 유창한 말솜씨를 가지고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창하게 잘 설명해줬습니다. 그 어부는 돌고래가 물에 떠다니는 나무 조각을 가지고 노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리고 돌고래를 잡기 위해 나무를 던져 미끼를 사용하는 방법을 설명했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이 어부는 사용하는 어휘가 몇 개 안됐지만 물고기와 바다, 그리고 돌고래에 대해서도 잘 알았기 때문에 돌고래의 습성과 돌고래를 잡는 법에 대해 모두 말해줄 수 있었습니다. 알고는 있지만 설명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진정으로 안다면 설명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기도를 정의해 보라고 하고, "기도를 통해서 어떻게 소망을 실현하시겠습니까?"라고 물을 때 대답할 수 있다면, 기도에 대해 아는 겁니다. 대답하지 못한다면 모르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마음의 눈 안에서 어떤 것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면, 훌륭한 말솜씨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들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표현하는 것보다 여러분 마음 안의 생각들을 훨씬 더 아름답고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들이 떠오를 겁니다.

여러분이 지난 네 번의 강의를 주의 깊게 잘 들었다면 성경이라는 것이 과거에 살았던 어떤 이의 이야기도 아니고, 이 땅 위에서 일어난 어떤 일들을 기록한 것도 아니란 것을 이해했을 겁니다. 성경의 저자는 역사를 쓴 것이 아니라, 역사의 옷을 입혀서 마음에 관한 위대한 드라마를 썼던 겁니다. 그래서 이성적이지 못하고, 분별력이 없는 대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표현했습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다양한 마음의 특징들을 지닌 바로 여러분입니다. 제가 성경의 이야기 중에서 열두 개 남짓한 이야기들을 뽑아, 해석해 보여주었을 때 이해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예수가 실존 인물이었다면 그렇게 품위가 높고 사랑이 가득 찬 사람이 요한복음 2장에서 그의 어머니에게 "여인이여, 그대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아할 것입니다.

이상과 하나 되지 못한 여러분과 저도, 우리의 어머니에게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랑의 화신인 예수가 그의 어머니에게 "여인이여, 그대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이고, 여러분의 어머니는 여러분의 의식입니다. 의식은 모든 것의 근원이기 때문에 모든 현상들의 위대한 아버지-어머니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습관의 산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각이 내놓은 증거들을 습관적으로 최종적인 결과로 받아들입니다. 이야기에서 손님들에게 대접할 포도주가 필요하지만 나의 감각기관들이 어디에도 포도주가 없다고 말하니, 나는 또 이걸 습관적으로 최종적인 결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의식은 만물의 근원이고 의식만이 유일한 실체라는 사실을 다시금 마음속에 상기시켜, 감각기관들이 내놓은 증거들을 거부하고 충분한 포도주가 있다는 인식을 사실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이 상황에서 예수는 자신의 어머니, 즉 결핍을 나타내는 인식을 나무랐던 겁니다. 그런 후, 손님들을 대접할 음식들이 충분하다는 인식을 사실로 받아들이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포도주는 제공됩니다.

청중이자 저의 소중한 친구가 보내온 편지 하나를 방금 전 읽었습니다. 그는 지난 일요일, 결혼식 때문에 교회에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계나 그 외에 모든 상황들이 그가 늦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차를 기다리며 길모퉁이에 서 있었지만 한 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친구는 마냥 기다리기 보다는 자신이 교회에 도착한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차 한 대가 그 앞에 섰습니다. 친구가 운전기사에게 자신의 곤란한 상황을 말하자, 그 기사가 대답했습니다. "그 길 말고 다른 길로 가겠습니다. 늦지 않게 도착시켜 드리죠." 그리고는 정말 예식이 시작되기 전에 교회에 도착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변의 상황들이 늦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거부한 채 법칙을 아주 정확히 사용한 겁니다. 결핍을 나타내는 것들을 절대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주변의 상황이 결핍을 나타내는 경우에,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나의 감각들이 내놓은 증거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모든 통들을 가져와서 그것들을 채우라. 다른 말로 하자면, 내가 포도주와 원하는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정합니다. 그러면 더 큰 차원의 나의 자아가 그 가정을 실현시키기 위해,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영감을 불어넣어 줄 것입니다.

이 성경의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여인이여 그대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말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감각기관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증거들이 결핍을 나타낼 때, 의식의 법칙을 아는 자가 스스로에게 "그대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사라져라."라고 말하는 겁니다. 다시는 저런 종류의 결핍을 나타내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다시 귀를 기울인다면 그것들이 말하고 있는 결핍의 씨앗을 내 안에 심게 되어, 결국에는 그 결핍의 열매들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예수가 시장함을 느낄 때의 이야기로 마가복음의 내용입니다.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혹시 거기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다가갔으나,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찾지 못하셨으니, 무화과의 때가 아직 아니었기 때문이더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무화과나무에게 말씀하시기를, '이후로는 누구도 네게서 열매를 먹지 못하리라'고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을 듣더라." [마가복음 11:13, 14]

"그리고 아침에 그들이 지나갈 때,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서부터 말라버린 것을 보더라." [마가복음 11:20]

시들어 버리게 한 나무는 무엇이겠습니까? 바깥세상의 나무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 자신의 의식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이다." [요한복음 15:1] 나의 의식, 나의 IAMness는 위대한 나무인데 습관이란 것이 말하기를, 그곳에는 아직 열매가 없다고, 그 열매를 먹기 위해서는 4개월의 기간이 남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4개월이란 시간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바람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4개월이나 기다려야 된다는 말을, 앞으로는 잠시도 믿지 않을 거라고 강력한 암시의 말을 건넵니다. 이 순간부터 결핍에 대한 믿음의 열매는 다시 열매 맺지 못하고 마음 안에서 다시 태어나지 못합니다.

이 이야기는 나무를 시들게 만든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나무, 도시, 사람들, 모든 것들은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성경 속에 나오는 단어 중 인간 마음의 다양한 속성들을 표현하지 않은 것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의식은 만물의 근원이자 유일한 실체입니다. 우리 자신의 의식이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후에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의식 안으로 시선이 향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근원이고, 하느님 외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마가 어떤 악한 짓들을 하고 하느님이 또 어떤 다른 일들을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음의 내용들을 주의 깊게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고레스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잡아 민족들을 그 앞에 굴복시키며, 왕들의 허리를 풀고, 그 앞에 두 개의 문을 열어 그것들이 닫히지 않게 하리라."

"내가 네 앞에 가서, 굽은 곳들을 곧게 하고, 놋문을 부수며, 철문 빗장을 끊으리라."

"또한 내가 너에게 어둠 속의 보물들과 은밀한 장소에 감춰진 부를 주어, 내가 네 이름으로 너를 부른 주,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알게 하리라." [이사야 45:1, 2, 3]

"나는 빛을 창조하고, 어둠을 만들며, 평화를 주기도 하고, 악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행한다." [이사야 45:7]

"내가 땅을 창조하고 그 위에 인간을 만들었으며, 내 손으로 하늘을 펼쳤고, 그 안에 모든 존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는 그를 의롭게 세우고, 그의 모든 길을 인도할 것이다. 그는 아무런 대가나 보상 없이 나의 도시를 세우고, 나의 포로들을 해방시킬 것이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이사야 45:12, 13]

"나는 주이며,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고, 나 외에 다른 신도 없다." [이사야 45:5]

이 말들을 주의 깊게 읽어보십시오. 이 말들은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의식이 유일한 실체라는 사실을 깨달은 분들이 한, 영감에 찬 말입니다. 만약 상처를 입었다면 그건 나 스스로 상처를 낸 것입니다. 나의 세상 안에 어둠이 있다면 그것은 나 스스로 만든 어둠, 흐림, 우울함입니다. 빛과 기쁨이 존재한다면 그것 역시 내가 만든 빛과 기쁨입니다. 모든 것들을 행하고 만드는 IAMness 외에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의식 바깥에서는 어떤 원인도 찾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세상은 여러분이 어떤 존재인지 말해주는 거대한 거울입니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여러분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자신의 의식 안으로 시선을 돌린다면, 여러분이 하는 기도는 어떤 기도보다 경건한 것이 될 겁니다. 저는 제 시선이 향할 곳은 오로지 저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 소망이 성취된 느낌을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감사함을 느끼고 있을 때, 어떤 기도도 제가 하는 기도보다 더 많은 기쁨과 믿음과 경건한 감정을 지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할 때, 이성과 감각들이 거부하는 것들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을 받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니, 그대가 무엇을 원하든지, 기도를 할 때 그대가 그것들을 받았다고 믿어라, 그러면 그대는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기도를 할 때, 누군가에 대해서 적대적이라면 용서하라. 그러면 하늘에 계신 그대의 아버지께서도 그대의 죄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그대의 아버지께서도 그대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마가복음 11:24, 25, 26]

우리가 기도할 때면, 위에서 말한 대로 행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병들어 있다거나 가난하다거나 그런 식의 안 좋은 것들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다면, 반드시 그것들을 풀어주어 사라지게 해야 합니다. 말로 사라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원하는 모습이 되어 있다고 믿음으로써 사라지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을 완벽하게 용서하는 겁니다. 그에 대한 나의 관념을 바꾸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그를 용서합니다. 완벽하게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것(Complete forgetfulness)이 용서입니다. 그 사람의 과거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지 않았다면 용서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진정으로 잊었을 때만이 용서를 한 겁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나는 너를 용서했어."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를 보게 될 때마다, 아니면 그가 생각날 때마다 예전에 그에 대해서 가졌던 감정들이 되살아난다면, 그를 완전히 용서한 거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용서란 것은 완벽하게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작업입니다. 의사는 여러분에게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무언가를 줍니다. 의사는 여러분의 병을 제거한 자리에, 그 무언가로 그곳을 채우려 하는 겁니다. 낡은 관념이 자리 잡았던 곳에 새로운 자아의 관념을 넣으십시오. 낡은 관념을 완전히 버리십시오.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기도가 아니었다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 기도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모든 행동의 근원이자, 명령을 내리는 마음이자, 기도를 이루게 하는 자는 바로 나입니다. 성공적으로 기도를 하는 사람은 내부로 시선을 돌리고, 그 안에서 구하고자 하는 상태를 취합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희생물로 바쳐야 할 것은 없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말하기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너는 발버둥 쳐야하며 고통을 인내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여러분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발버둥 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의 수많은 희생물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는 숫양의 번제물과 기름진 짐승의 기름으로 배가 불렀고, 나는 황소나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대가 내 앞에 나타날 때, 누가 내 뜰을 밟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을 그대의 손에 가져와야 한다고 말했는가?"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향은 내가 싫어하는 것이라. 새 달들과 안식일과 집회를 모으는 것, 나는 부정한 것들과 엄숙한 집회들을 참을 수 없다."

"그대들의 새로운 달들과 그대들이 정한 명절들은 나의 영혼이 싫어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나에게 커다란 짐이 되었느니. 나는 그것들을 짊어지기에 지치더라." [이사야서 1:11-14]

"그대에게는 성스러운 엄숙함이 지켜질 때의 밤의 노래가 있으며 또 마음의 기쁨이 있으니, 마치 어떤 사람이 관악기를 가지고, 주님의 산으로 그리고 이스라엘의 위대한 자에게로 갈 때와 같더라." [이사야서 30:29]

"주에게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땅 끝에서부터 그를 찬양하라." [이사야서 42:10]

"오, 그대 하늘들아, 노래하라. 주가 그 일을 해내셨기 때문이다. 소리 지르라, 그대 이 땅의 낮은 부분들아. 외치라. 너희 산들아. 오, 숲아! 또 거기 모든 나무들아! 소리 내어 노래할지니. 이는 주가 야곱을 되찾으셨고, 이스라엘로 자신을 영화롭게 하셨음이라." [이사야서 44:23]

"그러므로 주의 되찾은 자들이 돌아올지니, 그러면 시온으로 노래 부르며 돌아오리라. 그리고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을 얻을 것이며, 슬픔과 애도는 멀리 달아나리라." [이사야서 51:11]

하느님께서 유일하게 받을 수 있는 선물은 기쁨에 찬 가슴입니다. 노래 부르고 찬양하면서 오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의 의식인, 하느님 앞에 다가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여러분 소망이 성취되었다는 느낌을 사실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하느님께서 유일하게 받을 수 있는 선물을 가져오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소망이 성취되었다는 마음의 상태 외에는 싫어합니다. 그것 외의 것들은 미신이고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원하던 것이 일어났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내 앞에 올 때 기뻐하십시오. 내 앞에 올 때, 노래를 부르고 찬양하고 감사하면서 오십시오. 이 마음의 상태들은 구하고 있는 상태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올바른 감정 속에 자신을 놓는다면, 여러분 자신의 의식이 그것들을 현현시킬 것입니다.

저에게, 기도를 정의해서 최대한 명확하게 말해보라고 한다면, 전 간단하게 "기도는 소망이 성취된 느낌입니다."라고 말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기도가 응답받은 상황 속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나서, 그 확신 속에서 살면서 행동하는 겁니다."라고 말하겠습니다. 저는 그 느낌을 노력 없이 유지시키려 할 것입니다. 즉, 확고한 마음가짐을 갖고 걸어 나간다면 마음속에서 사실로 받아들인 것들이 현실로 드러난다는 것을 알고, 이미 원하는 것들이 현실이 된 것처럼 살며 행동할 겁니다.

성경이 역사에 대해 쓴 것이 아니냐는 논쟁을 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앞서 진행했던 네 번의 강의를 주의 깊게 들으셨다면 더 이상의 증거는 원하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여러분이 배우셨던 것들을 직접 적용하신다면 원하는 것들을 이루어낼 겁니다.

2. 미래의 창조: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힘

"그래서 이제 내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대들에게 말하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 그대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14:29]

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어떤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그 사건을 미리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이 3차원 세상에서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에 그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건들이 3차원 공간에서 일어나기 전에 사람들이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이 땅 위의 삶은 계획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계획이란 것은 반드시 이곳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존재했다가, 천천히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 속으로 옮겨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이 벌어지기도 전에 그 사건들을 봤다면, 그 사건들은 분명 이 세상 아닌 다른 곳에서 벌어진 사건일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곳에서 나타났다면, 3차원 세상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미리 결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고대의 스승들은 미래는 바꿀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저도 경험들을 통해 볼 때, 그 말이 진실임을 압니다.

그래서 지금 이 강의를 하는 이유도, 인간 안에 존재하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변화가 이루어졌을 때, 그 변화가 이루어진 시점부터 새로운 운명을 형성하게 됩니다. 변화가 일어난 것에 맞추어 미래는 변합니다.

인간의 미래에 관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변화 가능함에 있습니다. 미래란 것은 그것이 사전에 세세한 부분까지 준비되어 있긴 하지만 다양한 결과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매 순간마다 다양한 미래로 향하는 다양한 선택들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들은 확연히 구분됩니다. 그것은 현실적인 시야와 영적인 시야입니다. 이것을 고대의 스승들은 "현실적인 마음"과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시 바꾸어 불러보자면 전자는 감각이 지배하는 일상적인 깨어있는 의식이라 부를 수 있고, 후자는 소망이 지배하는 통제된 상상력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다음의 구절들에서 두 가지의 생각 초점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현실적인 사람은 하느님의 영의 것들을 받지 않나니, 그것들은 그들에게 어리석다 생각되기 때문이고, 그는 그것들을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영적으로만 분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2:14]

현실적인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만을 실체로 인식합니다. 현실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과거와 미래는 단순히 상상일 뿐입니다. 반면에 영적인 시각은 시간이 포함하고 있는 것들을 전체적인 통일체로 봅니다. 그래서 과거와 미래는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전체를 구성합니다. 현실적인 사람들이 본다면 정신적이고 주관적인 것들이, 영적인 사람들이 본다면 실제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됩니다.

감각이 내놓는 것만을 보는 습관은, 습관이 아니었다면 보았어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종종 의도적으로 감각의 증거에서 벗어나 우리의 마음을 풀어주고,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 상태를 마음속으로 느끼고 인지하여, 그것이 실제와 같은 분명함을 가질 때까지 연습해야 합니다.

생각을 특정한 방향으로 모으고 집중한다면 다른 쪽으로 향하던 감각들은 닫히고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들을 보기 위해서는 그 원하는 상태에만 의식을 놓아야 합니다. 감각의 영역에서 의식을 철수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의식을 놓는 습관은 우리의 영적인 시야를 확장시켜, 감각의 세계를 넘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게 만듭니다. "세상의 창조부터 그분에 속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뚜렷하게 보이더라." [로마서 1:20]

이것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은 여러분의 신체에 붙어 있는 눈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능력을 열어서 활동하게 하십시오!

조금만 연습해보면, 우리는 상상을 조절함으로써 욕망에 따라 미래를 다시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욕망은 행동의 주된 동기입니다. 욕망이 없다면 우리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든지 현재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욕망을 따르고 있습니다. 습관을 깨고 싶은 욕망이 습관을 계속 유지시키고 싶은 욕망보다 더 강하다면, 그때 습관은 깨집니다.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욕망은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습니다. 욕망이란 우리의 삶을 보다 더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어떤 부분이 지금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욕망이란 것은 항상 눈에 보이는 개인적인 이득을 가집니다. 예상되는 이득이 클수록 욕망도 거대해집니다. 완벽하게 비이기적인 욕망이란 것은 없습니다. 얻을 것이 없다면 어떤 욕망도 생기지 않고 결론적으로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부분은 우리의 물질적인 부분에게 욕망이란 언어로 말을 걸어옵니다. 보다 더 나은 삶으로 가는 열쇠 그리고 꿈을 성취하는 열쇠는 그 목소리를 즉각적으로 따를 수 있는지에 달렸습니다. 욕망이 내는 목소리에 주저하지 않고 따른다는 말은, 소망이 성취된 것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은 그것이 이미 우리 안에 있다는 겁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가 이미 나를 찾지 못했더라면 나를 구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망이 성취된 느낌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 확신 속에서 살면서 행동하면 인간은 그것에 맞추어 미래를 변화시킵니다. 사실로 받아들인 것이 그 스스로 규정했던 것들을 일깨웁니다. 소망이 성취된 느낌을 사실로 받아들이자마자, 4차원적인 자아는 그 목적에 다다르는 길들을 찾고 그것을 세상에 드러낼 방법들을 발견합니다.

소망이 이루어졌을 때 현실 속에서 겪을만한 일들을 마음의 영상 속에서 경험하는 것이라는 말보다, 이 방법을 잘 설명해주는 말은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결과를 경험하는 것은 그것을 이루는 방법을 찾게 만듭니다. 그때 4차원적인 자아는 보다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그 받아들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찾아냅니다.

3. 미래를 바꾸는 공식: 상상의 힘과 현실 창조

마음을 훈련하지 않았다면 감각이 거부하고 있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데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 "보이지 않는 것들을 현실처럼 불러내는 것"을 쉽게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즉,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 사건을 먼저 마음속에서 경험하는 것을 쉽게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간단한 것의 중요함을 가볍게 여기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 미래를 바꾸는 공식은 간단하지만, 수년간의 연구와 실험을 거친 후에 발견된 겁니다.

미래를 바꾸는 첫 번째 단계는 욕망입니다. 즉, 목표를 명확히 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여러분의 바람이 성취되었을 때에 겪을만한 사건을 구상하는 것입니다. 그 사건은 여러분의 바람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어야 하고 그 사건에서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몸을 움직이지 말고 자신을 잠에 든 것처럼 상상하여 여러분을 잠과 비슷한 상태 속에 들어가게 하십시오. 침대에 눕거나 의자에 편안히 앉으십시오. 그런 후에 눈을 감고, 경험하려고 계획했던 행동들에 여러분의 의식을 두고, 마음속에서 그 구상한 행동들을 하고 있다고 느껴보십시오. 여러분이 이것을 지금 여기서 실제로 하고 있다고 상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 상상 속의 행동들에 항상 참여하고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뒤로 물러서서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들을 하고 있어서 그 감각들이 여러분에게는 현실처럼 다가오도록 해야 합니다.

상상 속의 행동이 여러분의 바람이 성취되었을 때 일어날 만한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또한 그 행동이 현실과 같은 생생함과 뚜렷함을 가질 때까지, 여러분이 그 행동을 하고 있다고 계속 느껴봐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승진하기를 원한다고 해봅시다. 축하를 받는 일은 승진 후에 뒤따를만한 사건일 겁니다. 상상 속에서 경험할 일로 이 사건을 골랐다면, 몸을 움직이지 말고 잠과 비슷한 상태, 졸린 상태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러나 그 상태는 여전히 여러분의 생각의 방향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노력 없이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친구가 앞에 서 있는 것을 마음속에 그립니다. 여러분의 상상의 손을 그의 상상의 손과 마주잡고서는 단단한 실체로 느낀 후에, 그 행동과 어울릴 만한 상상 속의 대화를 하십시오.

이 공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지금보다 훨씬 뒤의 일로 축하받는 여러분을 그리지는 마십시오. 대신에 그 사건속의 장면이 지금 이곳이라 생각하고, 사건속의 그 시간이 지금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미래에 일어나는 일은 차원적으로 더 넓은 세상 안에서는 지금도 실체입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차원적으로 더 넓은 세상은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이 3차원적인 공간과 같은 실체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행동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과 영화 스크린에서 여러분의 모습을 그리는 것의 차이는 이 원리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사다리를 올라가고 있는 것을 그려본다면 이 차이를 이해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눈을 감고 사다리가 여러분 앞에 있다고 생각한 후에 그것을 실제로 올라가는 것을 느껴보십시오.

욕망, 잠과의 경계선상에서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 그리고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지금 여기에서 느끼는 상상 속의 행동, 이것들은 미래를 바꾸는 것에 있어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영적인 자아를 투사하는 데에도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움직이지 않고 마음속에서 어떤 행동을 한다는 생각을 할 때, 잠에 들 때까지 그 생각을 유지하면서 상상 속의 행동을 하는 것을 느낀다면, 이 물질적 육체로부터 깨어나 차원적으로 더 넓은 세상 속에서, 차원적으로 더 넓은 시야를 가진 채, 이 땅 위에서 하고자 구상했던 것들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차원적으로 더 넓은 세계에서 깨어나든 혹은 깨어나지 못하든, 우리는 4차원 세계에서 실제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고, 후에 이곳 3차원 세상에서 그 행동들을 재연해낼 겁니다.

경험을 통해 볼 때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 효과가 좋습니다. 상상 속의 행동을 한정시켜서 하나의 단일한 행동으로 압축시키세요. 그런 후에 현실이란 느낌을 가질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재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식은 연상되는 것들을 따라 이리저리 방황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수많은 연상되는 이미지들이 의식 앞에 나타나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목적으로 삼았던 이미지보다 훨씬 멀리 떨어진 곳으로, 그리고 먼 시간 후에 와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소망이 성취된 후에 뒤따를만한 행동으로 계단을 오르는 것을 골랐다면, 계단을 오르는 장면으로 한정시켜야 합니다. 마음이 다른 곳으로 방황하고 있다면 다시 계단을 오르는 일로 생각을 가져오십시오. 계단을 오르는 행위가 실제의 단단함과 뚜렷함을 지닐 때까지 상상 속의 행동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 생각은 우리의 의도적인 노력 없이도 마음속에 지속적으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소망이 성취된 느낌을 마음에 가득 채워야만 합니다. 졸린 상태는 "노력 없이 의식을 통제할 수 있는 상태"를 쉽게 만들기 때문에,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에 용이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졸음의 상태까지 진행되어 더 이상 의식의 움직임을 조절할 수 없을 정도가 돼서는 안 되고, 생각을 조절할 수 있는 정도의 적절한 졸린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소망을 이루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소망이 성취되었다는 느낌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나서 이완되고 졸린 상태에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와 같은 소망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짧은 문장을 사용해, 감사한 감정만이 마음을 채울 때까지 자장가처럼 반복하는 겁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소원을 성취하게 해준 더 높은 권능에게 말하듯이 하십시오.

그러나 만약 더 넓은 차원의 세계 안에 의식적인 투사를 하기 원한다면, 잠에 들 때까지 마음 안에서 행동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목적을 이루었다면 경험했을 만한 것들을 현실과 같은 뚜렷함을 가지고 마음 안에서 경험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상상 속에서 그 일을 겪었던 것처럼 때가 되면 육신을 가지고 겪게 될 겁니다.

사실로 받아들인 것은 진실이 된다는 명제를 가지고 마음에 영양분을 공급하십시오. 사실로 받아들인 것은, 비록 지금은 현실이 아닐지라도, 실제적인 느낌을 가질 때까지 계속 반복한다면 현실로 드러날 겁니다.

소망을 사실로 받아들였을 때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방법들은 선합니다. 사실로 받아들인 생각은 모든 이들의 행동, 움직임, 말에 영감을 불어넣어, 그들이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내도록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칩니다.

4. 차원의 시야: 4차원적 사고와 미래 변화

일정한 상상속의 경험이 사람의 미래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이해하려면, 차원적으로 더 넓은 세상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래를 바꾸기 위해 가야 하는 곳은 차원적으로 더 넓은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 사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3차원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건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3차원의 환경들을 변화시키려면 공간의 4차원에서 먼저 변화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사람은 차원적으로 더 넓은 세상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떤 의문도 가지지 않은 채, 차원적으로 더 큰 자아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사람들은 길이, 넓이, 높이의 3차원에 너무 익숙해져서 길이, 넓이, 높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에 4차원이 존재한다면 평범한 사람들이 길이, 넓이, 높이의 3차원을 뚜렷하게 느끼는 것처럼 4차원 또한 뚜렷하게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 하나의 차원은 하나의 선이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즉 하나의 사물을 가지고 4차원적으로 측정한다고 말하려면 길이, 넓이, 높이를 사용하지 않고, 어떤 다른 방향으로 그것을 측정해야 합니다. 길이, 넓이, 높이 외에 사물을 측정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시간이라는 것이 길이, 넓이, 높이의 3차원을 사용하지 않고, 나의 삶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란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시간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일정한 시간동안 사물은 계속 존재합니다. 길이, 넓이, 높이의 차원을 사용하지 않고도 사물이 존재했던 기간을 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은 사물을 잴 수 있는 네 번째의 방법입니다.

하나의 사물에 더 많은 차원이 존재할수록, 그것은 보다 더 본질과 근접하게 되고 실체에 다가갑니다. 하나의 직선은 완전히 1차원 위에 놓여 있는데 차원이 더해질수록 면과 부피와 물질이 됩니다. 그렇다면 부피가 면에 대해 새로운 특성을 주는 것처럼 그리고 면이 선에 대해 새로운 특성을 주는 것처럼, 시간이라는 4차원이 부피라는 것에 더해주고 있는 새로운 특성은 무엇일까요? 시간은 경험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매개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변화들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시간이 새롭게 부여하는 새로운 특성은 변화 가능함입니다.

다음을 살펴보겠습니다. 만약 물체를 자르면 그 단면은 면이 됩니다. 면을 자르면 선을 얻고요. 선을 자르면 그 단면은 점이 됩니다. 이것은 점이라는 것은 선의 단면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선은 면의 단면이고, 면은 물체의 단면입니다. 이성적인 추론을 더해 나가자면, 이 물체라는 것도 4차원 물체의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습니다. 모든 3차원적인 사물은 4차원 체의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여러분을 만날 때, 여러분의 4차원적인 자아를 만날 수는 없고 단지 4차원적인 여러분 존재의 단면만을 만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4차원적인 자아를 보기 위해서는 모든 단면들을 봐야하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여러분 인생의 모든 순간들을 보고,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현재 존재하는 전체로 봐야만 합니다.

제 시선은 여러분이 이 땅위에서 겪었고, 앞으로 겪게 될 감각적인 인상들을 전체적인 배열 속에 넣고 봐야 합니다. 여러분이 겪었던 일들을 차례대로 보아선 안 되고 그것들을 현재 존재하는 전체로서 보아야 합니다. 변화는 4차원의 특성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살아 움직이는 유동적인 전체로 보아야 합니다.

자, 이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이 사실들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면, 이것들이 3차원 세상의 우리들에게 가진 의미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만약 우리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이동한다면 우리는 미래를 볼 수 있고, 원한다면 그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단단한 실체라고 생각하는 이 세상도, 언제라도 나갈 수 있고 언제라도 넘어 갈 수 있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보다 근본적이고 차원적으로 넓은 세상으로부터 방사된 것입니다. 또 보다 근본적인 세상은 한층 더 보다 근본적이고 차원적으로 더 넓은 세상으로부터 방사된 것이고, 계속 반복한다면 결국 무한으로 갑니다. 세상에 아주 많은 차원을 더하더라도 무한이란 것은 어떤 방법이나 분석을 통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간단하게, 보이지 않는 상태 속에 의식의 초점을 맞추고 그것들을 보고 느끼려 함으로써, 우리는 차원적으로 더 거대한 세상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상태 속에서 의식이 모아지고 유지된다면, 지금 현재의 환경들은 사라지고 차원적으로 더 넓은 세상 속에서 깨어날 겁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각했던 사물은 단단하고 객관적인 실체로서 보일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차원적으로 더 넓은 세상으로부터 생각을 뽑아내어 마음 안으로 더 깊게 철수해 들어간다면 시간도 객관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직관적으로 느낍니다. 내부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서 시간을 객관적인 것으로 만들 때마다 공간은 차원적으로 더 넓은 세상이 된다는 것을 발견할 겁니다. 그리고 그 생각으로 인해 시간과 공간은 연속적이고, 인생의 드라마는 단순히 수많은 차원적인 시간의 구역들을 넘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결론을 낼 겁니다.

연속적인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를 과학자들은 언젠가 밝혀낼 겁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이 연속된 우주를 어떻게 이용해야 우리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보다 중요합니다. 미래를 바꾸는 것과 관련해서는 무한한 연속된 우주들 속에서 두 가지 세상에만 관심을 두면 됩니다. 하나는 우리 신체의 감각에 의해 인지되는 세상과 다른 하나는 신체기관들에 의존하지 않고 인지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다양한 미래 안에서 원하는 것을 고를 수 있는 선택들이 매 순간 자신 앞에 있다고, 저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나기도 전에 그 사건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런 질문이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3차원 세상에 머물러 있는 사람의 경험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면, 미래를 바꾸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다 말할 수 있지?"

우리가 이 땅위의 경험들을 이 인쇄된 종이에 비유해본다면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사람은 이 땅위에서 사건들을 하나씩 연속해서 겪고 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여러분은 이 페이지의 글자들을 하나씩 연속해서 읽고 있습니다. 이 페이지의 모든 글자가 하나의 단일한 감각적 인상들을 나타낸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문맥을 이해하고 제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맨 위쪽의 좌측에 있는 첫 글자부터 시작해서 오른쪽을 향해 한 글자씩 차례대로 시선을 이동시킬 겁니다. 그래서 이 종이의 마지막 글자에 다다랐을 때, 제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종이에 인쇄된 글자들은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 글자들을 재배열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글자들을 가지고 여러분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정말로 수많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할 수 있을 겁니다.

5. 밤에 꾸는 꿈과 낮에 꾸는 꿈

꿈이란 것은 통제에서 벗어난 4차원의 생각이거나 혹은 과거와 미래의 감각적인 인상들이 재배열된 것, 그 이상이 아닙니다. 깨어있을 때 경험하게 될 사건들을 순서대로 꿈을 꾸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시간적으로 따로 떨어진 두 가지 혹은 그 이상 되는 사건들을 하나의 단일한 감각적 인상들에 녹여 꿈을 꿉니다. 아니면 단일한 감각적 인상들이 완전히 재배열되어, 나중에 잠에서 깨어나 그 일들을 마주쳤다 해도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면, 저는 제가 사는 아파트 1층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우편물을 배달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레스토랑의 여주인은 "그곳에 두어선 안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에 엘리베이터 근무자가 편지 몇 개를 주었고 제가 그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했더니 그도 저에게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이때 저녁 엘리베이터 근무자가 나타나서 저랑 인사를 했습니다.

이 꿈을 꾼 다음 날, 제가 아파트를 나올 때 방문 앞에 놓여 있던 편지들을 집었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낮 엘리베이터 근무자에게 팁을 주며 편지를 전해놓은 것에 대해 고맙다고 했더니 그도 팁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제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호텔 문지기가 배달하는 사람에게 "그곳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파트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잡으려할 때, 레스토랑에서 낯익은 얼굴을 보고는 안을 들어다보자 여주인이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날 밤, 저녁 손님들을 엘리베이터까지 안내해주며 인사를 하자, 저녁 엘리베이터 근무자가 저에게 저녁인사를 건넸습니다.

몇 개의 단일한 감각적인 인상들을 재배열해보면 제가 다음 날 겪기로 예정되었던 것들이 됩니다. 그리고 두 개 혹은 그 이상 되는 사건들을 하나의 단일한 감각적인 인상 속으로 합쳐 놓는다면 깨어있는 동안 겪은 것과는 조금은 다른 꿈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4차원 세계에서 우리 의식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것을 배우게 되면, 3차원 세계의 환경들을 의식적으로 창조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우리는 깨어있는 꿈을 통해 의식을 조절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 그 상태에서 노력 없이 주의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노력 없이 주의력을 갖는 것은 미래를 바꾸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통제할 수 있는 깨어있는 꿈 안에서 3차원 세상에서 겪기 원하는 사건들을 의식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있는 꿈을 만들기 위해서 사용하는 감각적인 인상들은 시간 또는 4차원적인 세상 안으로 옮겨진 현존하는 실체입니다. 깨어있는 꿈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감각적 인상들이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곳으로부터 적절한 것들을 뽑아 재배치시켜서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나게끔 만드는 겁니다.

꿈을 아주 명확하게 정한 후에 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긴장을 풀고 잠과 비슷한 의식 상태를 만듭니다. 그 의식 상태는 잠과의 경계선상에 있지만, 의식의 움직임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 이 깨어있는 꿈이 객관적인 실체라면 현실 속에서 겪을 만한 일들을 마음 안의 영상 속에서 경험합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 이 기법을 적용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깨어있는 꿈 안에서 마음을 유일하게 지배하는 것은 소망이 성취된 것을 나타내는 행동과 감각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상상이 현실이 되느냐의 문제는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깨어있는 꿈을 물질적인 실체로서 받아들인다면 그것들 스스로 소망을 이루기 위해 방법들을 모색할 겁니다.

기도, 즉 통제된 깨어있는 꿈에 대한 기초에 대해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1.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하십시오.

2. 원하는 것이 성취되었다면 마주칠만한 사건을 구상하십시오. 그 사건은 여러분 자신이 주인공이 된 행동이어야 하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사건이어야 합니다.

3. 몸을 움직이지 말고 잠과 비슷한 상태를 불러일으키십시오. 그런 후에 구상했던 행동을 하고 있는 여러분을 마음속으로 느껴, 소망이 성취됐다는 감각만이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여기에서 실제로 그 행동을 하는 중이라고 상상해서,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현실에서 경험할만한 것들을 상상 속에서 경험하십시오.

제가 경험을 통해 볼 때 이 방법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가장 쉬운 길입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의식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통제했었다고 말한다면, 이 세상에서 제가 저지른 많은 실패들이 그렇지는 못했다는 것을 보여줄 겁니다. 그러나 고대의 스승과 더불어 다음과 같이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이 한 가지는, 뒤에 있는 것들은 잊고,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빌립보서 3:13,14]

6. 믿음으로 나아가라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이 한 일이 이 세상에 현실로 나타나게 하는 책임은 여러분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질지에 대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세상에 드러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것들을 세상에 드러낼 책임이 없습니다.

이 진리를 나타내는 구절이 출애굽기에 짧은 구절로 표현돼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세기에 걸쳐 그 구절을 읽고 말했지만, 내용을 잘못 이해했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새끼염소를 어미의 젖에 담그지 마라." (킹 제임스 버전 : "그대들은 새끼염소를 어미의 젖에 삶지 말라." [출애굽기 23:19]

1948년이라는 문명화된 시대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내용을 잘못 이해해서 우유에 관련된 제품들을 고기접시에 놓지 않으려 합니다.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역사적인 것이라 생각해서는, 성경의 "새끼 염소를 어미의 젖에 담그지 마라."라는 구절 때문에 우유, 버터, 치즈 같은 유제품들은 새끼염소나 어떤 종류의 고기와도 함께 먹지 않으려 합니다. 실제로 그릇도 따로 따로 구별해서 쓰려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 구절을 가지고 마음에 관한 해석을 내려야 합니다. 명상을 마치고 여러분은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의식은 하느님이고 여러분의 의식은 마치 생명의 물줄기 혹은 젖줄기와도 같아서, 의식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들에게 영양분을 주고 생명을 주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여러분의 주의를 끌고 있는 것은 여러분의 생명을 받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새끼염소는 제물의 상징이었습니다. 여러분 세상 안의 모든 것들은 여러분이 생명을 주어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것들에게 생명을 주었지만, 더 이상 그것들에게 생명을 계속적으로 주고 싶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크로노스처럼 여러분 아이를 먹어버리는 질투가 강한 아버지입니다. 이전에 세상에 태어나게 했던 것들이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될 때, 그것들을 먹어버릴 수 있는 권리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의식 안에서 과거의 상태를 떨쳐냅니다. 그 이전의 상태들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세상 안에 나타냈고 표현했던, 여러분의 새끼염소이자 아이였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는 이전의 상태를 뒤돌아본다거나, 그것들이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만약 뒤돌아보게 되어 그것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다시 한번 새끼염소를 어머니의 젖에 담그는 짓입니다.

"나는 정말 그 상태로부터 벗어났는지 궁금하다." 또는 "정말 그것들이 진실인지 궁금하다." 스스로에게 이런 의문을 던지지는 마십시오. 그것들을 현실로 드러내는 책임은 여러분의 어깨 위에 놓인 짐이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의식은 이미 그것들이 이루어졌다는 것에만 놓으십시오. 그것들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이미 그것들은 현실입니다. 이미 현실인 것을 여러분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여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저도 알지 못하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그것들은 현실로 드러날 겁니다.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이지 마시고 옛 상태를 뒤돌아보지 마십시오.

"그의 손에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가기 적당치 아니하다." [누가복음 9:62]

단지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십시오. 이성이 활동하지 못하게 하고 3차원 마음이 어떤 논쟁도 못하게 하십시오. 소망이 이루어지는 일은 3차원 마음의 능력 밖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마치 그렇게 된 듯 걸어 나가십시오. 그리고 사실로 받아들인 것들에 믿음을 유지할 때 상상들은 현실로 굳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