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날 강의
4차원적으로 생각하기

1. 4차원적으로 생각하기

4차원적으로 생각하기

고대에 성경을 쓴 이들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에 대해 깊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선들을 가리켜, 하나는 "현실적인 마음",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음 내용을 통해 생각의 두 가지 시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실적인 사람은 하느님의 영의 것들을 받지 않나니, 그것들은 그들에게 어리석다 생각되기 때문이고, 그는 그것들을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영적으로만 분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2:14]

현실적인 사람에게는 지금 이 순간만이 실체로 보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바로 이 순간만이 현실전체를 뜻하고 이외에는 모두 실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인 사람에게 있어서 과거와 미래는, 단순히 마음속의 이미지일 뿐입니다. 즉, 만약에 제가 현실적인 마음속에 있다면, 과거라는 것은 한 때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 속 영상으로만 생각될 겁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선이 현실적인 마음이 지니고 있는 한계에 둘러싸인 채 세상을 보면 미래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현실적인 마음이 보기에는 과거와 미래가 현재처럼 단단하고 객관적인 실체란 사실을 믿을 수 없고, 과거와 미래를 방문할 수 있다는 사실도 믿을 수 없습니다.

현실적인 마음이 볼 때는 과거, 현재, 미래를 각각 구분된 것으로 보지만, 4차원 시선이라고 부르는 그리스도 마음, 즉 영적인 마음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지금 존재하는 전체적인 하나로 보입니다. 영적인 마음은 인간이 과거에 경험했던, 지금 경험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경험할 모든 감각적 인상을 하나로 포착합니다.

우리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거대한 시선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늘날처럼 살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습관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습관이라는 것은 우리가 보아야만 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습관은 법칙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무리 세상에서 강력한 힘으로 행사되어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습관은 법칙이 아닙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새로운 시야를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매일 몇 분 동안 우리의 의식이 감각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를 현실처럼 느끼고 인지하면서, 그것에 집중하고 믿음을 유지해나가는 것을 연습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차원적으로 넓은 세상인 더 거대한 세상을 인식하게 될 겁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품었던 상태는 때가 되면 세상 밖으로 드러나 단단한 현실이 됩니다.

오늘밤 성경을 살펴보면서, 여러분이 현재 어디에 서 있는지, 스스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2. 마가복음 5장의 상징적 의미

마가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예수가 각각 별개의 경험들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를 보면 미친 사람 하나가 공동묘지의 무덤 뒤에 숨어 사는데, 예수가 이 사람에게 다가옵니다. 예수가 미친 사람에게 붙어 있는 악마를 내쫓으려 하자, 이 사람은 자신에게 붙어있는 악마를 내쫓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예수가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가복음 5:8] 라고 말합니다. 예수가 그 악마들을 쫓아냈고, 그 악마들이 스스로 파멸하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처음으로 옷을 입고 정신을 차리고는 스승의 발밑에 앉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깨어난 이성(enlightened reason)이라든지 4차원적으로 생각하는 것(fourth-dimensional thinking)이라고 바꾸어 본다면, 이 이야기에서 마음에 관련된 지혜를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어, 예수가 고위 사제인 야이로라의 집에 오게 됩니다. 그는 시나고그교의 높은 사제인데 그의 딸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사제는 예수에게 다가와 자신의 12살 난 딸아이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는 승낙하고 사제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가던 길에, 시장에서 한 여인이 예수의 옷을 건드렸습니다.

"예수께서 곧장 자신의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는 군중을 향해 고개를 돌리시고는, '누가 나의 옷을 건드렸는가?'라고 말씀하셨더라." [마가복음 5:30]

예수의 옷을 만진 그녀는 12년간의 하혈로부터 치유되었고, 예수에게 자신이 만졌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온전히 하였으니 평안히 가거라'고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5:34]

예수가 다시 시나고그교 사제의 집으로 계속 걸어갔습니다. 사람들이 예수에게 다가와서는 아이가 이미 죽었으니 더 이상 치료하러 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아이가 잠든 것이 아니라 죽은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말을 듣고는 시나고그교의 고위사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믿어라'고 하셨다." [마가복음 5:36]

"예수께서 도착했을 때, 그들에게 말하기를, '왜 야단법석을 떨며 슬피 우느냐? 그 처자는 죽지 않고 잠들었느니라.'" [마가복음 5:39]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예수를 조롱하고 비웃을 때, 그는 그 비웃는 사람들을 내보내고는 제자들과 죽은 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만을 그 집에 들였습니다. 그들은 소녀가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소녀를 잡고서, '그대에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5:41]

"깊은 잠으로부터 아이는 일어나서 가로질러 걸어가더라. 그러자 고위 사제와 다른 모든 이들이 놀라더라. 그리고 예수께서 엄히 당부하시기를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하시더라. 그리고 그녀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라고 명하시니라." [마가복음 5:43]

오늘밤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여러분을 마가복음 5장 안에 그려볼 수 있습니다. 공동묘지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합니다. 바로 죽은 이들을 기억하기 위한 겁니다. 혹시 여러분도 죽은 과거 속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닙니까? 여러분이 죽은 자들 사이에서 살고 있다면, 여러분이 생명을 주고 있는 선입견, 미신, 잘못된 믿음은 여러분이 그 뒤에 숨어 살고 있는 무덤이 됩니다. 그런 선입견과 미신과 잘못된 믿음들을 다 떠나보내지 않는다면, 마가복음 속의 미친 남자처럼 그것들을 내보내지 말아달라고 깨어난 이성(enlightened reason)에게 간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도 그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깨어난 이성은 편견이나 미신이 진리를 방해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깨어난 이성의 빛 앞에서는 어떤 선입견도 살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국가, 어떤 인종, 어떤 주의 등에 반대하는지 말씀해보십시오. 그것이 무엇인지 상관없습니다. 다만 여러분은 깨어난 이성의 빛 앞에서는 그런 것들을 살릴 수 없습니다. 그것들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깨어난 이성으로부터 숨겨야 합니다. 깨어난 이성의 빛 안에서는 그것들을 분석할 수도, 살릴 수도 없습니다. 4차원적인 시선이 여러분에게 다가와 삶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면, 여러분에게 씌워 있었던 이런 미신적인 것들을 모두 떨쳐버리게 됩니다. 그리고는 스승의 발이라 부르는 이해의 발밑에 앉게 됩니다.

이제 옷을 입고 제정신을 차린 여러분은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이야기 속의 죽은 아이는 무엇입니까? 이 이야기 속에서 아이는 그냥 아이가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속의 야망, 바람, 성취되지 않은 꿈입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 살고 있는 아이입니다. 말했듯이, 성경의 모든 이야기들은 마음에 관련된 것들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 존재했던 어떤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 속의 모든 이야기들은 여러분 개개인의 마음 안에서 계속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예수는 인간의 깨어난 이성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감각의 한계를 벗어나 활동하고 이전에 가졌던 한계들을 씻어낸다면, 더 이상 여러분은 미친 사람이 아니라 이 이야기 속의 예수이고 인간의 가슴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소망을 소생시킬 수 있는 권능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하혈이 있는 여인과 같습니다. 하혈이란 무엇입니까? 피가 흐르는 자궁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자궁이 아닙니다. 이야기속의 여인은 12년간 하혈을 앓고 있어서 임신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혈이 계속 진행됐기 때문에 그녀의 소망을 잉태시킬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다가 그녀의 믿음이 자궁을 닫았고, 그로써 이 온전해진 자궁으로 씨앗이나 생각들에 형태를 부여할 수 있게 됐습니다.

여러분이 이전에 갖고 있던 관념들을 지워버리고 원하는 모습이 된 것을 사실로 받아들여 믿음을 유지하게 될 때, 여러분은 그 상상에 형태를 부여할 수 있고 여러분의 죽은 아이를 소생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혈이 깨끗이 사라진 여인이 되었고, 이제 남은 일은 죽은 아이의 집으로 가는 겁니다.

아이, 즉 여러분의 원하는 상태는 이제 여러분 자아의 확고한 관념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갖지 못해서 원하기만 했지만, 이제는 그 원하던 것들을 이미 가졌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더 이상 원하는 행위를 계속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이젠 소망에 대해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존재로 변했는지에 관해서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확실하기에, 그냥 그 모습으로 걸어 나갈 뿐입니다.

원하던 것들이 성취된 듯 걸어 나아갈 때, 사람들은 4차원적인 세상에서 내가 이미 소망을 성취한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3차원적인 눈으로 본다면 더 이상 내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계에 둘러싸인 시야로 세상을 보니 아이가 죽은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법칙을 알고 있는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는 죽지 않았다.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고 있는 겁니다. 이제 소망이 이루어진 것을 사실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들을 눈에 보이게끔 깨웁니다. 사실로 받아들인 것들을 흔들리지 않고 유지한다면 그것들이 말하고 있는 것들을 일깨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이제 방문을 닫습니다. 문이란 무엇입니까? 감각의 문입니다. 감각이 보여주는 것들 모두를 완전하게 닫는다는 말입니다. 감각이 전해주는 증거들을 모두 거부합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상식적인 판단을 멈추고 감각이 부정하고 있는 존재가 이미 되었다는, 확신에 찬 선언을 하면서 당당하게 걸어 나갑니다.

감각의 문을 닫고 이런 통제된 상태 속으로 누구를 들였나요? 오로지 아이의 부모와 예수의 제자들만을 들입니다. 그리고 야유하고 비웃는 군중들을 향해 문을 닫습니다. 더 이상 외부에서 전해주는 증거들을 구하지 않습니다. 감각들은 내가 사실로 받아들인 것들을 야유하고 비웃으면서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들을 나에게 전해주지만, 나는 그것들을 완벽하게 거부합니다. 그리고 내가 사실로 받아들인 것이 실현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다른 이들과 의논하지 않습니다.

방 안에 남겨두었던 부모란 무엇을 말합니까? 모든 창조물의 아버지-어머니는 인간의 IAMness입니다. 인간의 의식은 하느님입니다. 나는 소망이 이루어진 상태를 인식합니다. 나는 모든 생각들의 아버지-어머니이고 나의 마음은 새로운 자아의 관념에 믿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 통제된 마음 안으로 제자들만을 들이고 그것을 거부하는 모든 것을 닫아버립니다. 이제 아이는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부활합니다. 사실로 받아들인 상태는 세상 안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어 상상의 힘의 증거들을 가져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결정하십시오. 제가 그 결정을 대신할 순 없습니다. 여러분은 죽은 과거 속에서 살든지, 하혈이 멈춘 여인으로 살든지 결정해야 합니다. 저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외부의 도움도 없이,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원하는 것들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까? 아니면 이전에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말하던 특별한 조건들을 갖추고,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거나 어떤 특별한 것들이 있어야 된다고 믿습니까?"

저는 어떤 특정한 교회들이나 종교단체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교회나 자신의 단체 외의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개신교도로 태어났습니다. 개신교에서 이야기하기를, 유일한 크리스천은 개신교도밖에 없다고 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유일한 크리스천은 가톨릭 신자라고 말합니다. 유대인에게 물어보면, 크리스쳔은 이방인이고, 유대인만이 선택받은 자라고 합니다. 이슬람교도에게 말할 때는 유대교와 크리스천은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 말할 때는 이런 모든 것은 천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누구에게 말하든 상관없이, 그들만이 선택받은 자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구원받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한 단체에 있어야 된다고 믿는다면, 여전히 미신과 과거의 선입견 뒤에 숨어있는 정신이 나간 사람입니다. 그리고는 이런 것들을 쫓아버리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중입니다.

어떤 이들은 저에게 말합니다. "인간 예수, 인간 모세, 인간 베드로에 대한 믿음을 버리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런 것을 요구한다면 너무 가혹한 일이에요. 이런 믿음들을 갖고 있는 것이 저에겐 오히려 혼돈스럽지 않습니다. 전 이런 믿음을 갖고도 당신이 말하고 있는 성경의 마음에 관한 해석들을 따를 수 있습니다."

죽은 과거로부터 나오십시오. 공동묘지로부터 나와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버지가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걸어 나가십시오. 하느님이라 부르는 여러분의 아버지는 여러분의 의식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창조의 법칙입니다.

자신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습니까? 비록 한계에 둘러싸인 3차원적인 시선으로는 원하는 목적을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이 사실로 받아들인 모습이 되었습니다. 사실로 받아들인 것과 맞추어 걸어 나가면서 믿음을 계속 유지하십시오.

3차원 안에서 시간이라는 것은 아주 천천히 흐르기 때문에, 어쩌면 실제로 받아들인 상상들이 세상 밖으로 현현되어 나오더라도 그것들이 한 때는 마음속에서만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마음 안의 것들은 항상 외부세계에 나타나지만, 시간이란 것이 천천히 흐르기 때문에 여러분은 둘 사이의 관계를 보지 못합니다.

자, 이제 여러분이 마가복음 5장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 판단해 보십시오. 죽은 아이를 부활시키고 있습니까? 마음의 자궁을 닫기 위해서 도움이 필요합니까? 계속 피가 멈추지 않아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까? 죽은 과거 속에서 살고 있는 미친 사람입니까? 여러분만이 판단할 수 있고, 여러분만이 이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3. 요한복음 5장의 치유 이야기

이제 요한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고대에 성경을 쓴 사람들이 세상에 대한 두 가지 시야를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제한된 3차원적인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4차원적인 시선입니다.

병든 자가 곧바로 치유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가 베데스다라 부르는 곳에 옵니다. 베데스다는 다섯 행각이 있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다섯 행각에는 수많은 병든 자들이 있습니다. 불구자, 맹인, 절름발이, 마비된 사람 등등. 전설에 의하면 매년 특정한 시기가 되면 천사가 내려와 다섯 행각 근처의 연못을 건드립니다. 천사가 그 연못을 건드리면, 그 안에 첫 번째로 들어간 사람은 반드시 치유된다 합니다. 그러나 오로지 첫 번째로 들어간 사람만이 치유될 뿐, 두 번째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는 태어날 때부터 절름발이인 사람을 보고는 말합니다.

"그대 낫기를 원하는가?" [요한복음 5:6]

"그 병든 자가 예수께 답하기를, '선생님, 연못이 흔들릴 때, 저를 그 연못으로 넣어줄 사람이 없나이다. 제가 그곳으로 가는 동안 다른 이가 저보다 앞서 들어가나이다.'" [요한복음 5:7]

"예수께서 그에게 '일어나라, 침상을 들고 걸어가거라'고 말씀하시더라." [요한복음 5:8]

"그러자 갑자기 그 사람이 나아서는 침상을 들고 걸어가니, 그 날이 안식일이더라." [요한복음 5:9]

이 이야기를 읽고는 어떤 이들은 아주 놀랄만한 힘을 가진 한 낯선 사람이 불구인 사람에게 "일어나서 걸어라."라고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는 개개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매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연못은 여러분의 의식입니다. 천사는 하느님의 메신저로서 생각을 뜻합니다. 의식이 하느님이기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천사를 맞이하고 있는 겁니다. 소망을 인식하면 연못은 흔들립니다. 소망은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을 원한다는 것은 마음이 흔들리는 겁니다. 원하는 것이 있거나 또는 아주 명확한 목적을 가질 때, 연못은 욕망이라는 천사에 의해서 흔들립니다. 이 연못에 처음으로 들어가는 자는 반드시 치료된다 합니다.

제 아내와 딸은 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지만, 그들을 부를 때면 2인칭으로 부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저는 그 사람에게 "당신(You are)"이란 호칭을 사용합니다. 그 외에는 삼인칭 호칭인 "그(He is)"를 씁니다. 일인칭 호칭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하나, 바로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나는(I am)"이라는 말은 나 자신에게만 쓰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쓰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가 원하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욕망을 의식할 때, 즉 연못이 흔들릴 때, 누가 나보다 먼저 그 연못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나만이 1인칭의 힘(첫번째 들어가는 자)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원하는 그 모습입니다. 제가 이미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예전의 모습으로 남고 그 한계 속에서 죽을 겁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여러분 의식이 욕망에 의해 흔들릴 때 여러분은 누구의 도움 없이 그 연못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이미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여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누구도 여러분보다 앞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원하는 모습이 되었단 것을 인식할 때 어떤 이가 여러분보다 앞서 그 연못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나는(I AM)'이라고 말할 수 있는 권능은 오로지 여러분 자신만이 가지기에 누구도 여러분보다 앞서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것들은 두 가지 시야를 말해줍니다. 여러분은 이제 감각이 거부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단 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만큼, 여러분은 확신에 차 있습니까? 이성과 감각은 여러분이 원하고 있는 모습을 사실이 아니라고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런 모습을 담대하게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스스로 연못에 들어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일어나서는 침상을 들고 걸어가게 될 겁니다.

이 일은 안식일에 일어났다고 말해집니다. 안식일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있고, 결과에 대한 조바심을 가지지 않을 때 생겨나는 고요함에 대한 신비적인 뜻입니다. 안식일은 일을 하지 않는 휴일입니다. 어떤 것을 완성하기 위해 애쓰지 않을 때, 여러분은 안식일을 맞이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관심을 끄고 이미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걸어 나갈 때, 여러분은 손 하나 까닥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안식일에 있는 겁니다. 결과가 어떤 경로로 이루어질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이미 그렇게 되었다는 것만을 의식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자유롭고 안정되고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인식한다면, 실제로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거나 수고하지 않고 이런 의식의 상태들을 유지합니다. 그렇게 안식일에 들어섭니다. 그러면 안식일에, 여러분은 일어나 걷게 됩니다.

4.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

다음에 볼 이야기는 요한복음 4장인데,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예수가 우물가에 갔는데, 그곳에 사마리아 여인이 있습니다. 예수는 그녀에게, "나에게 먹을 물을 달라."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4:7]

"그러자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에게 말하기를, '어떻게 유대인인 당신이 사마리아 여인인 저에게 말씀하십니까? 라고 하더라. 왜냐하면 유대인은 사마리아인들과 교제가 없기 때문이더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녀에게, '만약 그대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마실 물을 달라고 그대에게 말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안다면, 그대는 그에게 요청했을 것이고, 그는 살아있는 물을 그대에게 주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더라." [요한복음 4:10]

"그 여인은 우물은 깊은데 예수께서 물을 기를 것이 없음을 보고는, '당신께서는 우리에게 우물을 주시고 그로 인해 그의 자손들과 그의 가축들이 먹을 우물을 주신 야곱보다 위대하시나이까?'라고 묻더라." [요한복음 4:12]

"예수께서 대답하시어 그녀에게 말씀하시더라. '이 물을 먹는 자는 누구든 다시 목이 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이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이 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오르는 우물이 될 것이다. '"

"그리고 예수는 그녀에게 그녀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하고, '가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시니, 그녀가 '저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더라." [요한복음 4:17]

"예수께서 그녀에게, '나에게 남편이 없다고 말한 것은 옳도다. 왜냐하면 그대는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 함께 있는 남자는 그대의 남편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더라." [요한복음 4: 17,18]

"그 여인은 이것들이 진실이라 생각하고, 시장으로 가서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메시아를 만났습니다.'라고 하더라. 그들이 묻기를, '그대는 어째서 메시아를 만났는지 아는가? 라고 하더라."

"왜냐하면 내가 이전에 했던 것들 모두를 내게 말했기 때문입니다."라고 그녀는 대답합니다. 이것은 적어도 그녀의 과거 전체를 아우르는 시야이며, 지금 그녀에게 미래에 관하여 말해줍니다.

이야기를 계속해서, 제자들이 예수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스승이시여, 드소서." [요한복음 4:31]

하지만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그대들이 알지 못하는 먹을 것이 있노라." [요한복음 4:32]

그들이 추수하기까지 4개월이 남았다고 하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추수를 하기까지 4개월이 남았다고 그대들은 말하지 말라. 보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들의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이미 그 곡식들이 추수하도록 하얗게 되었느니라." [요한복음 4:35]

사람들이 추수하기까지 4개월 혹은 4년이 남았다고 말하지만, 예수는 차원적으로 넓은 세상 안에서 지금 하얗게 익어 추수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 살펴보겠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3차원적인 여러분입니다. 그리고 우물가의 예수는 4차원적인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이 되고자 하는 모습과 이성이 여러분에게 말하는 현재의 모습 사이에 논쟁이 벌어집니다. 여러분 내부의 거대한 자아가 말하기를,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그렇게 될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작은 자아는 그 좁은 식견으로 말합니다.

"물은 깊은 데, 어째서 물을 기를 양동이도 없고, 줄도 없나요? 그 밑까지 들어갈 방법도 없이, 어떻게 그 깊은 곳까지 닿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대답합니다. "만약 그대가 물을 달라고 말하는 이가 누군지 안다면, 그대는 그에게 구할 것이다."

여러분 안에서 지금 소망하고 있는 상태를 세상으로 나타나게끔 충동질하고 있는 것이 누군지를 안다면, 그 작은 시야로 보는 것을 멈추고 그가 스스로 그 일을 하게끔 놔둘 겁니다.

예수가 여러분에게 다섯 남편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자, 여러분은 다섯 남편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우리의 오감을 뜻하는 다섯 남편은 매순간마다 그들이 가져오는 한계들로 우리를 잉태시킵니다. 감각들은 오늘, 내일, 그리고 미래에 어떤 아이들을 낳을지에 대해 여러분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섯 가지 감각들은 하느님의 위대한 자궁이라 말할 수 있는 여러분의 의식을 지속적으로 잉태시키는 다섯 명의 남편들과 같습니다. 그리고 감각기관들이 매순간마다 받아들이고 있는 감각의 증거들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진실로 받아들여야 할지를 설득하고 명령합니다.

예수가 말하기를, 여러분이 남편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은 현재 여러분의 남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여섯 번째는 아직 그녀를 임신시키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다섯 남편들은 그 여인이 원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다섯은 권위를 가지고, 무엇을 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말합니다. 여러분이 원하고 있는 것들을 실제처럼 느끼지 못하고, 그것으로 마음을 채우지 못하고, 그것으로 마음을 임신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남편이라 부르는 자들은 진정한 남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다섯 남편들이 잉태시켜 낳게 하는 아이는, 여러분이 원하는 아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닮은 아이를 출산한다는 사실은 그가 남편이라는 증거이거나, 적어도 그와 정을 통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아직 여섯 번째 남편과 닮은 아이를 출산하고 있지 않고 단지 다섯 남편과 닮은 아이를 출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후에 예수가 나를 보며, 내가 알고 있었던 모든 것들에 대해 말합니다. 다시 마음의 눈을 통해 보겠습니다. 깨어난 이성이 내게 말하기를, 지금껏 사는 동안 감각기관이 주는 한계만을 받아들이며 살았다고 합니다. 항상 감각이 내놓은 증거만을 사실로 받아들여서 아침, 점심, 저녁 그 감각들이 증거로 내놓은 것만을 세상에 태어나게 했습니다.

깨어난 이성이 말하기를, 나는 태어나면서 이들 다섯만을 알고 지냈다 합니다. 이제 이 다섯 감각의 한계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직 나에게는 이들 다섯이 거부하고 있는 것들을 나라고 받아들이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확신에 차 있지 않습니다. 결국 이 감각의 한계들을 벗어나 이성이 거부하는 것들을 넘어서 발을 내디딜 용기는 없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인식하면서, 이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음식이 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며, 나는 포도주이다. 저는 제가 원하는 것들을 알고 있고, 저는 그 빵이기 때문에 그것을 즐깁니다. 제가 이 방 안에서 여러분에게 말을 하고 있고, 여러분은 제 말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즐기는 대신에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 있다는 사실을 즐기는 대신에, 저는 다른 곳에 있고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걸어가고 있는 사실을 즐깁니다. 그러다보면 점차적으로 저는 제가 즐기고 있는 모습이 되어갑니다.

5. 네빌의 개인적 체험: 바베이도스 이야기

저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 두 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바베이도스라는 작은 섬 안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살았습니다. 바베이도스에서 가축들에게 주는 먹이는 바다를 건너서 들여와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비쌌습니다. 저희 형제들은 10명이었고 부모님과 할머니를 합해 전부 13명의 대가족이었습니다. 한 주가 시작되는 즈음에 어머니가 요리사에게 이렇게 말하던 것이 기억납니다.

"일요일 저녁으로 먹으려 하니까, 오리 세 마리를 떼어 놓아야겠어요."

요리사는 오리 세 마리를 작은 축사에 따로 가두어서 일주일 간 옥수수나 신 우유 등을 주거나 아니면 나중에 오리에서 특별한 맛이 나기 원하는 것들을 먹이로 줍니다. 그리고 7일 후에 오리를 잡아 식탁위에 올렸을 때 그것들은 옥수수와 우유로 키운 아주 맛있는 오리가 됩니다.

그런데 가끔은 요리사가 식사로 나올 오리를 따로 떼어놓는 것을 깜박 잊을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평소 하던 대로 요리사가 따로 떼어놓았을 거라 믿고는 물고기로 키운 세 마리 오리를 식탁에 올려놓습니다. 정말 물고기로 키운 오리들은 손도 댈 수 없을 정도로 맛이 없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자로서 정신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은 물질적인 음식을 먹고 형성된 존재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제공된 음식을 먹고 형성된 존재입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제공된 음식이 구체화된 존재입니다.

그 오리에게 아침에는 옥수수를 주었다가, 점심에는 물고기를 주었다가, 저녁에는 다른 것을 주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식단이 완전히 바뀌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경우에도 아침에는 명상을 하고, 점심에는 누군가를 저주하고, 저녁에는 또 어떤 다른 행동들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새로운 마음의 식단에 들어가서 일주일 동안 마음의 음식들을 완벽하게 바꿔야만 합니다. "무엇에서든지 진실하며, 무엇에서든지 정직하며, 무엇에서든지 공정하고, 무엇에서든지 순수하고, 무엇에서든지 좋은 평판을 얻고, 만약 어떤 덕이 있거나 어떤 칭찬할 것이 있으면 그것들을 생각하라. " [빌립보서 4:8]

사람은 마음 안에서 생각한 대로, 그렇게 됩니다. 세상에 나타내고 싶은 마음의 음식을 골라내서 그것을 즐긴다면 그렇게 될 겁니다.

이젠 제가 왜 오늘날과 같은 일을 하고 있는지 말해보겠습니다. 1933년 뉴욕에서 나이가 지긋한 친구 압둘라 밑에서 5년 간 히브리어를 배웠습니다. 바로 그때가 정말, 저에게 쌓여있던 미신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던 시기입니다. 그에게 처음 갔을 때, 저는 미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저는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물고기도 닭도 먹지 않았습니다. 살아있는 이런 종류의 것들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성스럽게 되기 위해서 담배도 피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았으며, 독신주의자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압둘라가 말했습니다. "자네가 미쳤다고 말하지는 않겠네. 그런데 네빌, 자네가 하고 있는 그런 것들은 모두 어리석은 것들이야. " 하지만 저는 그것들이 어리석은 것들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습니다.

1933년 11월, 저는 뉴욕에서 바베이도스로 떠나는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그 당시에 바베이도스를 떠난 지 12년이 지났던 때였지만, 바베이도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성공하지 못했었고, 성공한 가족들을 보러 집에 간다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미국에서 12년을 지냈지만, 제 눈에 비친 제 자신은 실패자였습니다. 극장에서 일했었고 일 년에 걸쳐 돈을 벌면 그 다음 달에 다 써버렸습니다. 사람들의 기준으로 보나 제 자신의 기준으로 보나 저는 실패자였습니다.

11월에 부모님께 작별인사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바베이도스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부모님이 탄 배는 떠나고 제가 다시 뉴욕의 거리로 돌아왔을 때 저는 갑자기 바베이도스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가 1933년이었습니다. 직업도 없고 75번가의 제 작은 방을 제외하고는 갈 곳도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곧장 압둘라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압, 정말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12년 만에 처음으로 바베이도스에 가고 싶어졌어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네빌, 만약 자네가 가고 싶다면, 자네는 이미 그곳에 있는 것이네. " 너무도 이상한 말이었습니다. 제가 분명 뉴욕의 72번가에 있는데, 그는 제가 바베이도스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뜻이죠, 압둘라, 제가 이미 갔다니?"

그가 말했습니다. "정말로 가기를 원하나?"

대답했습니다. "예."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자네가 이 문을 통해 나갈 때, 이젠 더 이상 72번가 거리를 걷는 것이 아니네. 야자수와 코코넛이 줄지어져 있는 거리를 걷고 있는 중이네. 이곳은 바베이도스인거지. 어떻게 그곳에 가게 될지에 대해서는 나에게 묻지 말게. 자네는 바베이도스에 있네. 이미 자네가 '그곳에 있을' 때, '어떻게'라고 말하지는 않네. 자네는 거기에 있네. 이제 자네가 거기에 있는 것처럼 걸어 나가게."

멍한 채로 그의 집을 나왔습니다. 저는 바베이도스에 있습니다. 저는 돈이 없습니다. 저는 일자리가 없습니다. 옷도 잘 차려입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베이도스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논쟁할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2주가 지났지만, 처음 바베이도스에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보다 더 나아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말했습니다. "압, 저는 전적으로 당신을 신뢰하고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보이지가 않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위한 돈이 한 푼도 안 모였어요. " 저는 저의 상황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아십니까? 압둘라는 에이스 카드처럼 흑인인데다가 터번을 머리에 걸치고 있습니다. 제가 거실에 앉아 있었는데 압둘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서재로 들어가면서, 따라오지 말라는 뜻으로 문을 꽝 닫았습니다. 들어가면서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자네에게 말해야 될 것들은 모두 말했네. " 12월 3일에 저는 다시 압둘라 앞에 서서, 제가 바베이도스로 가는 일이 전혀 진전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시 말했습니다. "자네는 바베이도스에 있네."

저는 크리스마스까지 바베이도스에 가고 싶었는데, 그때까지 도착하는 마지막 배가 12월 6일 구 네리사항(old Nerissa)에서 출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12월 4일, 직업도 없고 갈 곳도 없이 늦게까지 잠들어 있었습니다. 일어나보니 문 밑에 바베이도스에서 온 편지 한 통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편지를 뜯어보자 작은 종이 하나가 나부끼며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집어보니, 50달러짜리 수표였습니다.

저의 형 빅터에게서 온 편지였는데 내용은 이랬습니다. "나는 너에게 여기로 오라고 부탁하지는 않겠다. 네빌, 이건 명령이다. 우리 가족들 전부가 함께 모여 크리스마스를 지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 너만 온다면 크리스마스에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을 거다."

제일 큰 형, 세실이 집을 떠났을 때는 막내가 태어나기 전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한 명씩 차차 떠나기 시작해서, 우리 가족 역사에서 한 번도 식구 전체가 모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편지에는 계속 적혀 있었습니다. "너는 일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네가 이곳에 오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 같구나. 그러니 크리스마스 전까지 꼭 오거라. 여기 50달러를 보내니, 이것들로 네가 여행하는 데에 필요한 옷들이며 신발이며 이런 것들을 사거라. 만약에 네가 술을 마신다면 바를 이용해라. 팁을 줄 필요도 없을 거다. 내가 선박을 찾아가서 너의 팁이며 추가비용들을 다 지불하겠다. 내가 뉴욕에 있는 퍼니스위디 선박회사에 전보를 쳐서 네가 사무실에 오면 티켓을 끊어주라고 말했다. 50달러는 필요한 소소한 것들을 사는 데에 써라. 내가 만나서 해결해줄 테니, 밖에 나가서 외상을 해놔도 좋다. " 그래서 저는 퍼니스위디 선박회사에 가서 편지를 보여줬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읽어보더니 대답하기를, "빅터씨에게서 전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12월 6일 떠나는 배에 자리가 남아 있지 않군요. 유일하게 남은 것은 뉴욕항과 성 토마스(St. Thomas)항 사이에 3등급 자리밖에 없습니다. 손님께서 1등급 자리를 예약하셨지만, 뉴욕항에서 성토마스항까지는 3등급 자리로 여행을 하셔야 되겠는데요. 성토마스항에 도착을 하면 내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곳에서 바베이도스까지는 1등급 자리를 타실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12월 4일 오후에 다시 압둘라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정말 꿈같은 일이 벌어졌어요." 그도 기뻐할 거라 생각하면서 일어났던 일들을 말했습니다.

그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3등급자리로 여행을 한다 했지? 내가 자네에게 3등급 자리로 여행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던가? 자네는 바베이도스에 있고, 1등급 자리로 그곳에 도착했네."

12월 6일,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그를 보지 못했습니다. 여권과 배를 타기 위한 서류를 가지고 항구에 도착했을 때 관리인이 말했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고다드씨! 예약을 취소한 손님이 계셔서 1등급 자리로 가게 되셨습니다."

압둘라는 생각에 믿음을 유지하면서 타협하지 않는 것의 중요함을 가르쳤습니다. 저는 제가 바베이도스에 있고 1등급 자리로 여행한다는 사실에 흔들렸고, 압둘라는 믿음을 끝까지 유지했습니다.

6. 믿음의 변화, 현실의 변화

우리가 배운 두 가지 성경 이야기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물은 깊은데, 양동이도 없고 줄도 없습니다. 추수하기까지는 넉 달이나 남았는데 예수는 "그대들이 알지 못하는 먹을 것이 나에게 있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원하는 것이 실현되었다는 상태에서 그 생각을 즐기고, 그 생각과 하나가 되십시오. 이미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걸어 나가십시오. 그것을 즐기고 마음의 식단에 믿음을 유지한다면 세상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이 세상 안에서 여러분은 바로 그렇게 될 겁니다.

바베이도스에서 아주 행복한 3개월을 보내고, 1934년에 뉴욕에 돌아왔을 때 저는 수년간 하지 않았던 술, 담배 등 여러 가지 것들을 다시 했습니다.

저는 압둘라가 저에게 했던 말이 기억났습니다. "네빌, 자네가 이 법칙을 증명한 후에는 정상으로 돌아올 거네. 자네는 무덤으로부터 걸어 나오게 될 거고, 성스러워지고 있다고 믿었던 죽은 과거로부터 걸어 나오게 될 거세. 네빌, 자네가 지금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 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네. "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다시 지상을 걷게 되었습니다. 1934년 2월, 그날부터 보다 풍성하게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항상 성공만 했다고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제가 의식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통제해서 현현하고자 하는 생각들에 항상 믿음을 유지할 수 있다고 여러분에게 말한다면, 세상에서 제가 저지른 많은 실수와 실패가 그 말이 틀렸음을 보여줄 겁니다.

하지만 고대의 스승들처럼, 비록 과거에 실패한 듯 보일지라도, 저는 매일매일 이 세상에서 제가 되고자 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판단하는 것을 멈추십시오. 그리고 이성과 감각들이 말하고 있는 것들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그런 후에 새로운 식단에 믿음을 가진다면 여러분이 믿음을 주고 있는 이상을 세상에 나타낼 수 있을 겁니다.

세상에서 바베이도스와 가장 다른 곳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그곳은 뉴욕일 겁니다. 바베이도스에서 가장 높은 빌딩은 3층이고, 거리에는 야자수와 코코넛 나무 같은 열대성 나무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그런데 뉴욕에서 나무를 보려면 공원을 가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바베이도스의 거리를 걷는 것처럼 뉴욕의 거리를 긔어야만 했습니다. 상상 속에서는 그 어떤 것도 전부 가능합니다. 저는 실제로 바베이도스의 거리를 걷는 것처럼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상 속에서 코코넛이 늘어선 거리의 향기를 거의 맡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바베이도스에 있었다면 현실적으로 만났을 만한 환경을 마음의 눈 속에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 상상에 믿음을 유지했을 때 누군가가 여행을 취소했고 제가 그 티켓을 받았습니다. 한 번도 제가 집에 오는 걸 생각해본 적 없던 바베이도스에 있는 형이 낯선 편지 하나를 쓸 충동을 갖게 됩니다. 형은 제게 단 한 번도 명령이란 걸 내렸던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명령을 했습니다. 그리고 형은 저를 집으로 방문시키겠다는 생각을 스스로 했다고 믿었습니다.

저는 꿈같은 3개월의 시간을 보내고 1등급 좌석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제 주머니에는 선물로 약간의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만약에 제가 이 모든 경비들을 지불했다면 3000달러 정도를 썼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주머니에 있는 동전 하나 쓰지 않았습니다.

"나에게는 그대가 모르는 길이 있다. 나의 길들은 그대가 이해할 수 없더라."

차원적으로 더 거대한 내부의 자아는 저의 상상을 명령으로 받아들였고, 편지를 쓰도록 형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고, 1등급 좌석 여행을 취소하도록 누군가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거대한 내부의 자아는 제가 하나 되었던 상상을 실현시키도록 필요한 모든 일들을 준비했습니다.

저는 바베이도스에 있다는 느낌과 저를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마치 그곳에 있는 것처럼 잠에 들자, 주변 모든 사람의 행동들은 제가 상상한 것에 맞춰서 일어났습니다. 저는 퍼니스위디 선박회사에 가서 승차권을 구걸하고 1등급 좌석을 예약한 사람의 취소를 부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 저의 형한테 편지를 써서 돈을 좀 보내달라고 구걸하거나 승차권을 사달라고 조를 필요가 없었습니다. 형은 그 행동을 스스로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까지도, 형은 저를 집으로 오도록 만들겠다는 마음속 충동이 본인에 의해서 생겼다고 믿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친구 압둘라는 제게 확실히 말했습니다. "네빌, 자네는 바베이도스에 있네. 자네가 그곳에 가기를 원한다면, 그곳이 어디일지라도 자네는 그곳에 있는 걸세. 마치 그곳에 있는 듯 살게. 그러면 그렇게 될 걸세."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 두 가지 시선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구인지는 상관없습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은 그 인종에 상관없이, 그 국적에 상관없이, 그가 믿는 신조에 상관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두 가지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현실적인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영이 주는 것들을 어리석은 것이라 여겨 받지 않는 사람이거나, 영적인 사람으로서 모든 것들은 차원적으로 보다 더 넓은 세상에 지금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감각의 한계를 넘어서 인지하는 사람입니다. 추수하기 위해 넉 달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우물 앞에 있는 사마리아 여인이거나 예수입니다.

여러분은 다섯 행각에서 연못이 흔들리면 누군가가 자신을 밀어 넣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거나,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과 상관없이 스스로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공동묘지의 무덤 뒤에 숨어 지내면서 선입견들이 씻겨나가는 것이 두려워, 쫓아내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입니까? 사람들에게서 가장 버리기 힘든 것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미신과 선입견입니다. 무슨 보물이나 되는 듯 이런 것들을 꼭 쥐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씻겨 나가서 자유로워질 때, 여러분의 마음인 자궁은 자동적으로 치유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소망의 씨앗들이 뿌리를 내리고 현현 속으로 자라날 수 있는, 준비된 토양이 됩니다. 지금 가슴 속에서 태어나려는 아이는 여러분이 현재 갖고 있는 소망입니다. 현재 갖고 있는 소망은 아픈 듯 보이는 아이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는 태도를 취할 때 더 이상의 흔들림이 사라지기 때문에 아이는 잠시 동안 죽은 듯이 보입니다. 원하던 모습이 된 것을 느낄 때 그 상상 속에서 만족을 느끼기 때문에 여러분은 더 이상 흔들릴 수 없습니다.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겉으로만 보고 판단한다면, 여러분이 더 이상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 사람들이 보기에는 여러분의 바람 혹은 여러분의 아이가 죽었다고 생각할 겁니다. 더 이상 비밀스러운 야망을 이야기하지 않는 여러분을 보며, 사람들은 여러분이 야망을 잃었구나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완벽히 그 이상에 자신을 맞췄습니다. 원하는 모습이 되었단 것을 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여러분은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며, "나는 그녀를 깨우러 간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다는 믿음 속에서 걸어 나갑니다. 그렇게 걸어갈 때 잠든 여자아이를 고요하게 깨웁니다. 그리고 그녀가 일어나면, 먹을 것을 주는 것처럼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행동을 할 겁니다. 그것을 떠벌리고 다니거나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 내가 원하는 상태에 주의를 기울여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그것을 내 세상 안에서 유지하기 위해 계속 주의를 기울입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들은 내 세상 속에서 점차 시들어 버립니다. 그것들이 그냥 태어나서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그것들이 되었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그것들에 생명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들을 내 세상 속에 구현하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입니다. 이제 나는 그 상태를 지속시키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날은 그것에 대한 나의 관심이 멀어진 날이며, 그 상태는 내 세상 속에서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내가 내 세상의 다른 것들에 주의를 기울일 때, 그것들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앞의 장애물에 주의를 기울여서 영양을 공급하고는 그 장애를 산처럼 거대한 것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소망들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이미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3차원적인 시야와 4차원적인 시야를 이야기할 때, 고대의 교사들이 모든 사람들 마음속의 이 두 가지 초점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충분한 이해 속에서 이 두 가지를 인격화시켰고,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뺏는 유일한 것은 습관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였습니다. 습관이라는 것이 법칙은 아니지만, 모든 심리학자들이 말하기를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데에 가로놓여진 가장 거대한 장애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습관은 철저하게 인간을 한계 속에 묶어둬, 습관이 아니었으면 이루었을 것들에 대해 완전히 눈을 멀게 합니다.

지금 원하는 모습을 마음속으로 보면서 이미 그 모습이 되었다고 느끼기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아침, 점심, 저녁 그 느낌 속에서 그것들을 즐기십시오. 저는 성경을 세심하게 살펴보면서, 3일보다 더 긴 기간이 있는지 찾아보았는데 그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어 그들에게, '사원을 무너뜨려라, 그러면 3일 안에 나는 그것을 일으켜 세울 것이니라'고 말씀하시더라." [요한복음 2:19]

"음식물을 챙기어라. 3일 동안 그대는 이 요르단을 건너, 주 하느님께서 너에게 가지라고 주었던 그 땅을 갖기 위해 가게 될 것이라. " [여호수아서 1:11]

만약 하나의 느낌에 마음을 푹 적셔서 이미 사실이 된 것처럼 걸어 나갈 때 믿음만 유지한다면 3일간의 마음의 식단 이상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약속드립니다. (저는 이 위대한 책에서 제가 말씀드린 것과 모순되는 구절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관된 마음을 지녀야만 합니다. 만약 하루 중의 식단을 바꾼다면(믿음을 바꾼다면), 그 기간은 늘어날 겁니다. 여러분은 제게 묻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그 기간에 대해 알죠?" 여러분 자신이 그 기간을 결정합니다.

어떤 단어 하나가 오늘날 우리들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저도 그것을 깊게 살펴보기 전까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작용(Action)"이라는 단어입니다. 작용은 세상에서 가장 근원적인 것이라 말합니다. 원자는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욱 근원적인 겁니다. 원자의 부분인, 전자 같은 것도 아닙니다. 더욱 더 근원적인 겁니다. 4차원적인 단위라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근원적인 것은 작용(Action)입니다.

여러분은 작용이 무엇인지 물을 겁니다. 물리학자들이 말하기를 작용이란 시간에 의해 증가되는 에너지라고 합니다. 이 말에 더욱 혼란을 느껴, 다시 물을 겁니다. "시간에 의해 증가되는 에너지? 그게 무슨 뜻이죠?" 물리학자들이 대답합니다. "아무리 강력한 자극을 가하더라도 일정한 시간 동안에는 반응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극에 반응하는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이 지나지 않는다면,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뒤집어보면, 반응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요구되는 최소한의 자극이 필요하고, 그 자극이 없다면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반응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근원적인 것들을 작용, 즉 시간에 의해 증가되는 에너지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그 기간을 3일로 잡았습니다. 그 기간은 세상에 대한 반응이 오는 3일을 말합니다. 원하는 모습이 된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믿음을 유지해서 마치 내가 그렇게 된 듯 그 믿음 속에서 걸어 나간다면, 그것이 작용되는 최고 긴 시간은 3일입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가정해보고 현실에서 겪을 만한 일을 상상 속에서 경험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상상 속에서 사실로 받아들인 세계를 거부하는 것들 모두에 대해 귀를 닫고 눈을 감으십시오. 이렇게 한다면 제가 로스앤젤레스를 떠나기 전에 여러분은 저에게 와서, 이전에는 희망사항일 뿐이었던 것들을 현실에서 실현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죽은 듯 보이는 아이를 살릴 수 있는, 이 지식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것이 저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이 여자아이는 정말로 죽지 않고 단순히 잠들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아이에게 먹을 것을 준다면 그 아이는 여러분의 세상 안에서 부활한, 살아있는 실체가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저와 함께 그 기쁨을 나누고, 여러분의 기쁨 속에서 저 또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강의의 목적은 여러분에게 여러분 자신이 곧 의식의 법칙, 즉 존재의 법칙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그 법칙입니다. 단지 그 법칙이 작용하는 것을 모를 뿐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원하지 않는 것들에게 영양을 공급해 생명을 주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드린 말씀들을 갖고 이 이론을 직접 시험해보십시오. 이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위안거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진실이 아니라면 그것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진실이란 것을 압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증명하거나 사실이 아니라고 증명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할 겁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론을 받아들이면서 그것들을 직접 시험해보기를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실패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위치는 어떻습니까? 이론들이 정말로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을 시험해볼 정도로 용기를 내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말합니다. "이것들이 정말 된다는 것을 꼭 시험해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어. 진짜로 시험해보기는 싫어. 가짜라고 증명되지 않는 한은, 이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잖아."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법칙이 사실이라고 증명하든지, 사실이 아니라고 증명하십시오. 만약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실험해본다면, 여러분은 사실이라는 것을 밝혀내게 될 것임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인해 저는 더 풍요롭게 될 겁니다. 돈이나 물건들을 가져서 풍요롭게 된 것이 아니라, 제가 믿고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것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열매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5일간의 강의가 여러분에게 실망을 주기보다는 여러분에게 성공과 만족을 던져주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제가 가르친 내용들을 갖고 진실인지 진실이 아닌지 증명하기 위해 직접 이 법칙들을 시험해볼 정도로 대담해지시기 바랍니다.

7. 실천과 기도의 기법

침묵의 시간에 들어가기 전에 기도의 기법들을 다시 한 번 간단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 법칙을 적용할 때, 두 가지 방법을 쓸 수 있습니다. 여기 모인 분들 모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오늘밤 그 기법을 사용해서 결과를 제대로 얻지 못한다면, 내일도 그 원하는 것들에 대한 갈증이 여전히 남을 겁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안 후에 그것들이 성취된 것을 나타내는 단일하고 간단한 사건을 마음의 눈으로 구상하십시오. 그런 후에 여러분 자신이 그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듯, 뒤로 물러나 앉아서 구경하는 대신에 그 드라마 속의 실제 배우가 되어야 합니다.

그 사건을 단일한 행위로 한정시키십시오. 악수를 하는 것이 여러분의 소망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면 그 행동, 오로지 그 행동만을 하십시오. 악수를 하고, 상상 속에서 방황하면서, 저녁파티에 갔다가, 아니면 다른 장소에 갔다가 이러지 마십시오. 상상 속의 행동을 단순하게 악수를 하는 것, 그것으로만 제한시키십시오. 악수하는 것을 계속 반복해서 그 행동이 단단하고 명확한 실체로 느껴질 때까지 해야만 합니다.

만약 상상 속의 행동에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목적을 명확히 하고 여러분 소망이 이루어진 느낌을 하나의 단일한 문장으로 만드십시오. "멋지다."처럼 여러분 바람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십시오. 혹은 만약 누군가를 통해서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라서 감사함을 느끼는 것이라면,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겁니다. 그리고 그 문장을 마치 자장가처럼 반복 또 반복하세요. 그래서 마음이 감사하는 마음, 그 하나의 감각만으로 가득 채워질 때까지 그렇게 반복하십시오.

이제 고요하게 자리에 앉아서, 소망이 이루어진 것을 나타내는 생각을 하나의 문장이나 하나의 행동으로 압축시켜 보겠습니다. 긴장을 풀고 몸을 움직이지 마십시오. 자, 이제 상상 속에서 그것들을 경험해보십시오.

상상 속에서 악수하는 것을 그린다고 해서, 여러분 육체의 손을 움직이지는 마십시오. 그건 그냥 그대로 움직이지 말고 있어야 합니다. 육체의 손 내부에 자리 잡은 손이 더욱 더 정교하고 더욱 더 실체에 가까운 손입니다. 여러분의 상상 속에서 그 손을 빼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상상 속의 손과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친구의 상상의 손을 맞잡으시고, 악수하는 것을 느끼십시오. 상상 속의 육체가 활동을 하고 있더라도 실제 육체는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자, 침묵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