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민수기로 넘어가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하나를 보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여러분 중 몇몇은 여기 민수기에서 묘사한 경험을 가져봤을 거라 생각합니다. 살펴볼 내용은 하느님께서 예배당을 만들라는 명령을 하는 부분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자기 자신을 예배의 장소로 만들라 명령했습니다.
예배당 모습에 관한 모든 세세한 사항들을 하느님께서 말씀해주십니다. 길어야 하며 움직일 수 있는 찬양의 장소여야 하며 가죽으로 뒤덮여 있어야 합니다. 더 말할 필요 있을까요? 사람 아니겠습니까?
"너희가 하느님의 사원임을, 그래서 하느님의 영이 네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을 모르느냐? [고린도전서 3:16]
다른 사원이란 없습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사원입니다. 이 사원은 길어야 하며 가죽으로 뒤덮여 있어야 하며 사막을 가로 질러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당이 세워지던 낮 동안에는 구름이 예배당, 즉 증거의 천막을 덮었고, 저녁에는 불의 모양 같은 것이 아침까지 있더라. 그래서 낮에는 구름이 덮여 있고, 저녁에는 불의 모양이 덮여 있더라." [민수기 9:15, 16]
낮 동안에 구름이 올라갈 때까지, 그리고 저녁 동안에 불이 올라올 때까지는 머물러 있으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아니면 일 년이든지 구름이 예배당 위에 머무를 때면,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그들의 천막에서 머물고 여행을 하지 않더라. 그러나 구름이 걷히면, 그들은 이동하였다." [민수기 9:22]
여러분 자신이 예배당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구름은 무엇인지 궁금할 겁니다. 하지만 명상 중에 여러분 중 다수가 이것을 봤을 거라 생각됩니다. 명상 중에 마치 우물의 지하수 같은 이 구름이 자연스럽게 머리 위로 올라와서 고동치는 황금색 고리를 형성합니다. 그 다음 잔잔한 강처럼, 살아있는 황금색 고리의 물결이 머리에서 흘러나갑니다.
잠에 들기 전에도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그 구름은 솟아오릅니다. 바로 이 졸린 상태에 들어설 때,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원하는 것을 가졌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구름은 여러분이 사실로 받아들인 것을 현실로 받아들여서, 받아들인 사실에 맞추어 현실을 만들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구름은 간단하게 말해 의식의 옷입니다. 그래서 구름은 여러분의 의식이 놓인 곳에 있게 되고, 결국은 여러분의 몸뚱이도 의식이 머문 곳에 놓이게 될 겁니다.
이 황금빛 구름은 깊은 침묵 속에서 나타납니다. 잠에 가까워질 때, 그것은 매우 짙고, 매우 유동적이며, 살아있고 고동치는 느낌이 듭니다. 졸린 상태, 깊은 침묵 상태, 잠과의 경계선 상에 있을 때, 그것은 머리 위로 솟아오릅니다. 그 구름이 올라오기 시작할 때까지 여러분은 예배당을 철거하거나 움직이지 않습니다.
졸린 상태에 도달할 때, 그 구름은 항상 솟아오릅니다. 사람이 잠에 들 때면, 그가 알든 모르든, 3차원적인 세상에서 4차원적인 세상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때 무언가가 솟아오르는데, 그것은 인간의 의식으로, 더 거대한 시선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바로 4차원적인 시선입니다.
그때 여러분이 보고 있는, 솟아오르는 것은 여러분 내부의 거대한 자아입니다. 그 구름이 올라가기 시작할 때, 여러분은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다는 느낌을 현실처럼 가져야 합니다. 바로 이 구름이 솟아오르는 때가 원하는 존재가 이미 되었다는 분위기 속으로 자신을 달랠 시간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상상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다면 현실에서 경험했을 법한 일들을 체험하거나, 이미 이루었다는 느낌을 주는 짧은 문장을 반복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정말 놀라워! 정말 놀라워!" 같은 문장을 계속 반복하십시오.
"깊은 잠에 빠졌을 때, 꿈속에서 그리고 밤의 환영 속에서 그분은 인간의 귀를 열어, 그들에게 할 지시를 봉인하신다." [욥기 33:15,16]
잠들기 직전의 시간을 현명하게 쓰십시오. 소원이 성취되었다는 느낌을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그 분위기 속에서 잠자리에 드십시오. 밤에, 차원적으로 더 거대한 세상 속에서,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사람들은 이 땅에서 후에 상영될 드라마들을 보고 그 역할들을 연기합니다. 내부의 거대한 자아가 읽고 연기한 대로 이 땅위의 드라마, 즉 현실은 펼쳐집니다. 자유의지라는 환상은 단지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원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잠에 빠졌을 때 마음을 지배하는 감각들은, 지금 당장은 현실이 아닐지라도, 곧 현실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잠에 들 때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다는 느낌을 가정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게 "현실이 되어라!"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이루는 모든 수단들에게 명령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원하는 모습이 됩니다.
저는 수많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을 때에도 잠들기 전, 저 자신을 그곳에 있다고 상상하면 상황이 빠르게 변해서 결국 그곳으로 가게 된 경우를 많이 겪었습니다. 밤에 잠을 잘 때, 원하는 여행지에서 잠에 든 것처럼 상상을 했습니다. 아침이 되자 상황들은 제가 상상했던 것에 맞춰서 스스로를 만들어 갔고, 주변 모든 상황들은 제가 현실에서 그 여행을 하게끔 변해갔습니다. 저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잠들었을 때 상상했던 장소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해야만 했습니다.
구름이 솟아오를 때,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된 것처럼 혹은 가기 원하는 장소에 이미 있는 것처럼 상상합니다. 그런 후에 그 상태 속에서 잠에 듭니다. 그러면 제 주변 상황들은 예배당을 철거하고 주위 환경들을 철거하고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건너서 환경들을 새로 만들어, 상상했던 것과 비슷한 곳으로 새로 만듭니다. 성경의 이 내용은 물질적인 사막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주변에 펼쳐진 이 넓은 세상 모두가 사막입니다.
우리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마치 사막을 걷듯이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살아있는 예배당이 있고, 우리가 잠들거나 잠에 가까운 상태에 있을 때 구름이 예배당을 덮고 솟아오릅니다. 그 구름은 꼭 이틀이 걸리는 것은 아니고 2분에라도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왜 이틀이라고 말을 했을까요? 내가 오늘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면, 어쩌면 내일은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을 겁니다. 이동하기를 결정하기 전에 적어도 하루의 시간을 줘야만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 예배당을 가지고 이동하기로 결정했을 때, 이틀이나 한 달이나 일 년 안에 구름을 솟아오르게 하였습니다. 구름이 솟아올랐을 때, 여러분은 구름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구름은 말하자면 여러분의 생각, 즉 의식의 옷입니다. 의식이 가는 곳에 여러분의 육체를 갖고 갈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 뜻과 상관없이 육체는 그곳으로 저절로 끌려 올 겁니다. 의식이 머무르고 있는 곳을 향해 육체가 움직이도록, 모든 상황들은 일어날 겁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많은 거처가 있느니라.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너희에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마련하러 가노라.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리니,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리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많은 거처가 있느니라.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너희에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마련하러 가노라.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리니,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 3]
여러분은 하느님이 머무는 집이라 말할 수 있으니, 많은 거처들은 여러분 마음속의 수많은 상태들을 말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수많은 자아에 대한 관념들이 있습니다. 그 영원함 속에서 고갈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모습이 된다 해도 영원함 속에서 어떤 것도 고갈되지 않을 겁니다.
고요히 눈을 감고 자신이 어떤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그곳에 가서 그 처소를 준비한 겁니다. 그러다 눈을 뜨게 되면 자신이 처소를 준비하러 갈 때 두고 간 이 육체로 다시 돌아오게 되고, 마음속에서 준비했던 장소는 사라집니다. 하지만 적당한 시간이 되면 준비해두었던 장소로 육체를 가지고 가게 될 겁니다. 여러분이 마음속에서 준비해둔 그 장소로 가기 위해, 어떤 경로와 방법들을 거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고요히 앉아서, 여러분이 어떤 곳이든지 마음속에서 현실처럼 만들어 내십시오.
그러나 이것을 너무 경솔하게 사용하지 마십시오. 이것을 경솔하게 사용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잘 알기 때문에 주의를 드립니다. 저 역시 단순히 날씨 때문에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어서 경솔하게 다뤘던 적이 있습니다. 뉴욕의 한 겨울이었습니다. 너무 추워서 인도제도의 따뜻한 날씨를 원해, 제가 야자수 나무 밑에 자는 것을 상상하면서 잠에 들었습니다. 그 다음날 눈을 떴을 때, 제가 있는 곳은 여전히 추운 겨울 날씨 속의 뉴욕이었습니다.
저는 그 해에 인도제도에 갈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슬픈 소식이 날아와서 그곳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그때는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배들이 침몰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듣고 48시간 후에 배를 타고 뉴욕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 소식만이 유일하게 저를 바베이도스에 가게끔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저는 늦기 전에 도착해서 어머니의 3차원적인 육체에게 "안녕"이라는 작별인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인도제도로 나갈 계획이 없었지만, 내부 깊은 곳의 자아는 거대한 구름이 내려앉은 곳을 보았습니다. 그 구름은 바베이도스에 내렸고, 저의 몸인 예배당은 "너의 발걸음이 닿는 곳 어디라도, 나는 그것을 너에게 주었다."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됩니다. 구름이 사막 어디에 내려앉더라도, 그곳에서 여러분은 예배당을 새로 만들게 될 겁니다. 저는 한밤중에 배가 침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뉴욕을 떠났습니다. 저는 반드시 가야만 했습니다. 제가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상황들은 전개됩니다.
주의하십시오. 경솔하게 이것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작동하는지 시험 삼아 나를 래브라도로 가게 해보자." 이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래브라도에 가게 될 것이고, 이 수업에 참석한 것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자기 전에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느낌을 취해나간다면 그 법칙은 작동할 겁니다.
잠자리에 들 때 여러분의 마음을 조절하십시오. 이 기법을 부르기에 가장 적당한 말은 "통제 가능한 깨어있는 꿈"일 겁니다. 꿈속에서는 통제력을 잃습니다. 따라서 완벽하게 통제 가능한 깨어있는 꿈을 가지고 잠들기 전의 상태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진짜 꿈속에서 여러분이 주인공이듯, 그렇게 주인공으로서 깨어있는 꿈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꿈속에서 여러분은 항상 배우일 뿐, 관객이 아닙니다. 통제 가능한 깨어 있는 꿈에서도 여러분은 배우가 되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동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행동한 것들은 3차원적인 세상 속에서 육체를 가지고 반드시 재연되기 때문에 경솔하게 다루지 마십시오.
자, 이제 침묵의 시간에 들어가기 전에 분명하게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난밤에 말씀드렸던 노력이라는 것입니다. 이 넓은 세상 속에서 사람들이 실패하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현대의 심리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노력하고 있는 것과 상반된 결과가 일어나는 법칙(the law of reverse effort)'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이루어진 느낌을 사실로 받아들일 때, 최소한의 노력으로 해야 합니다. 여러분 의식의 방향을 통제해야 하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해야 합니다. 통제를 할 때, 특정한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여 억지로 하려 한다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겁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얻게 될 겁니다.
그것은 왜 아담이 잠에 든 것을 가지고 성경의 기초를 세웠는지를 설명합니다. 잠에 든 것은 창조행위의 첫 걸음이고, 성경 어디에서도 그 깊은 잠에서 이제껏 깨어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가 잠자는 동안에 창조는 멈춥니다.
여러분이 잠과 비슷한 상태에 들어가 생각을 조절할 때가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최적의 시간입니다. 그래야 노력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잠과 비슷한 상태 속에서 여러분 의식은 충분히 이완됩니다. 그때 억지로 하려 하거나 노력을 기울이지 말고 그 느낌 속에서 의식을 유지시키는 것을 연습해봐야만 합니다.
한 순간이라도 의지의 힘으로 이런 일들을 해낸다는 오해를 하면 안 됩니다.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와 하나가 될 때, 의지적으로 그렇게 되려 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된 것을 인식하는 겁니다. 그것이 해야 할 일 전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