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날 강의
성경의 진정한 의미

1. 진정한 성경의 의미

성경이란 것은 역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제가 성경에 대해서 이렇게 마음과 관련된 해석을 계속 내리더라도 여러분 중 일부는 여전히 겉으로 드러난 문자에 얽매여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 할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여러분이 배워온 것처럼 사람이나 사건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이 고정된 관념을 빨리 지우는 것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도 성경 속에서 몇 가지의 이야기들을 말해보겠습니다. 그러면 이것들을 여러분의 마음 안에서 다시 한 번 재연해보길 바랍니다. 이 이야기들은 마치 이 세상에서 눈을 뜨고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 안의 깊은 자아인 잠들어 있는 나와, 의식을 가지고 깨어있는 나 사이의 이야기라는 것을 마음속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것들은 사람으로 인격화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그 이야기들을 실제로 적용하려 할 때면, 졸린 상태의 중요성을 생각해야만 할 것입니다.

어젯밤에 말했듯이 모든 창조활동은 잠자는 상태 또는 잠과 비슷한 상태, 잠이 드는 졸린 상태 속에서 일어납니다. 최초의 인간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다고 어젯밤에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깊은 잠 속에 빠져 있는 최초인간입니다. 창조자인 여러분은 4차원적인 존재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집은 잠에 빠진 상태입니다.

2. 요한복음 바라바 이야기

우리가 오늘밤 첫 번째로 살펴볼 이야기는 요한복음의 내용입니다. 여러분이 이 이야기를 들어보시고, 어제 이야기했던 창세기의 내용과 오늘의 이야기를 마음의 눈으로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역사가들이 주장하기를, 요한복음이 기록되기 3천년 전에 지구 위에서 일어난 일을 적은 것이,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라고 합니다. 좀 더 이성적으로 이 이야기들을 보면서 혹시 한 작가가 이 두 가지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닌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즉, 영감을 받은 한 작가가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 아닌지 말이죠.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이야기로, 예수가 재판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는 빌라도에게 끌려왔고 군중들은 예수의 목숨을 원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그들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유월절이면 한 사람을 놓아주는 것이 관례인데, 너희들은 내가 유대인의 왕을 놓아주기를 바라느냐? 그러자 그들이 소리 질러 다시 말하기를, 그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이나이다. 그런데 바라바는 강도더라." [요한복음 18:39,40]

빌라도는 누구를 놓아주어야 될지를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선택권이 없었고, 법관으로서 오로지 법을 해석할 수만 있었습니다. 이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군중들이 원하는 것에 따라야만 했습니다. 빌라도는 군중들의 요구와는 상반되게 예수를 풀어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라바를 풀어줬고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여러분의 의식이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하느님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에게 예수라 불리는 아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라바(Barabbas)라는 단어를 성서의 색인사전에서 찾아본다면 두 가지 히브리 단어의 결합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BAR)는 딸 또는 아들, 즉 아이들을 뜻하고 압바(ABBA)는 아버지를 뜻합니다. 바라바는 위대한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예수를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인 구세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는 두 명의 아들이 나오는 겁니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에서도 두 명의 아들이 나왔습니다. 진정한 정의는 눈을 가려야만 이루어지는데, 이삭은 눈이 멀었다고 합니다. 이 경우 빌라도는 육체적으로 눈이 먼 것은 아니지만, 판사로서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눈이 멀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세계의 모든 주요 법원 건물에는 정의를 상징하는 사람이 눈을 가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고, 의로운 심판으로 판단하라." [요한복음 7:24]

이 이야기에서 빌라도는 이삭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두 명의 아들이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을 여러분의 삶에 대입시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강도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이 강도 아들은 지금 이 순간에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훔쳐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원하는 무언가를 가슴 안에 간직한 채, 오늘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랬다면 여러분은 바라바의 무리들 속에서 걸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은 원하고 있는 것을 지금 현재 가지고 있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들이 다 여러분의 것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열망하는 상태 속에서 계속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스스로 강도짓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언가를 원한다면, 나는 구세주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면 나는 나의 예수, 나의 구세주를 거부하고 있는 겁니다.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은 나에게 그것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내가 그(I AM He)라는 것을 믿지 아니하면, 그대는 그대의 죄 안에서 죽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주어진 것을 믿지 아니하여 받지 않고, 계속 주어지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이렇게 계속 요구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이미 주어졌다는 것을 믿고 즐겨야 합니다.

3. 유월절 의식

이야기 하나를 더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유월절(Passover) 축제에 관한 내용입니다. 지금 무언가가 변화하려는 중입니다. 무언가가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 변화하기 위해서는 지금 의식이 꽉 붙잡고 있는 것을 놓아주어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의식 안에 꽉 잡고 있는 것은 여러분을 지금 있는 곳에 계속 그대로 묶어두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태양이 양자리에 들어설 때, 유월절 축제가 열리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신비적인 유월절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대한 상징과 관련해서 유월절(Pass over) 축제를 거행한다는 것은 지금의 의식 상태로부터 다른 의식 상태로 건너가는(pass) 것을 말합니다. 저는 바라바를 풀어줌으로써 유월절 의식을 치릅니다.

바라바는 내 안의 세상 속에서 지금 실현시킬 수 있는 것들을 뺏어간 도둑, 강도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상태는 구세주 예수로 인격화되었습니다. 만약 원하는 모습이 된다면 이전의 나의 모습에서 구원된 겁니다. 만약 원하는 모습이 되지 못했다면 내가 할 수 있었던 것들을 뺏어가는 도둑을 내 안에 가둬두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지구상에 살았던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나 어떤 역사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 속의 인물들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 바라바가 되었든 예수가 되었든, 우리는 항상 둘 중 한 쪽을 살려두고 있습니다. 누구와 함께 하고 있는지는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다.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묶어야 한다고 외쳤던 군중들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가 유대인이라 말하는 민족이 아닙니다. 그들과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우리도 현명하다면, 원하는 모습이 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갈라놓고 분리시키고 소원과 이상에 다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마음 상태를 풀어주라고 외치는 군중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오늘밤 예수를 구현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만약 아직 이루지 못한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그 소망의 성취를 방해하는 도둑을 여러분이 마음속에 품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것입니다. 그 이름은 바로 바라바입니다.

유월절(Passover) 혹은 과월절(crossing over)이라 불리는 신비적이면서 정신적인 변형을 경험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지금 당장 원하는 이상과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 이상에 믿음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믿음을 계속 유지해 나간다면 믿음으로 십자가에 이상을 묶어놓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이의 도움도 없이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뒷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아무도 이전까지 자신이 묻혀있는 무덤의 돌을 치우고 일어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돌은 치워졌고, 죽어서 묻혀있다고 생각했던 이가 스스로 부활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는 의식을 지니고 걸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여러분 의식 속에 만들어 놓은 자신의 모습을 다른 이들이 볼 수는 없습니다. 의식 안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세상 밖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여러분 인생의 문제와 장애들을 제거해달라고 다른 이들에게 부탁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의식 상태는 스스로 고유한 방식으로 세상에 나타나고, 결국 모두가 그것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자, 이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와 이삭과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의 공통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한 명은 다른 이의 자리를 꿰찼고, 사람들은 그를 찬탈자라고 부릅니다. 육십 권 남짓한 성경을 편찬한 이는 왜 야곱을 예수의 선조로 만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의 저자는 야곱이 에서의 자리를 빼앗은 인물로 그리면서, 그를 열두 아들의 아버지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그 다섯째 아들인 유다로부터 요셉이 태어나는데, 이 요셉은 독특한 방식으로 예수의 아버지가 됩니다. 야곱이 에서의 자리를 뺏은 것처럼 예수도 바라바의 자리를 뺏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도 두 아들의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 중 한 명을 놓아주고 싶어 하는군요. 여러분은 도둑을 풀어주라고 외치는 군중이 될 수 있고, 기꺼이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말하는 재판관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는 골고다에서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골고다는 생각의 자리이자 머릿속의 특정 장소를 일컫습니다.

유월절(Passover)을 경험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 과거의 자아로부터 새로운 자아관념으로의 이동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지금 될 수 있는 모습들을 훔쳐가고 있는 현재 자아관념인 바라바를 놓아주어야만 합니다. 그리고는 바꾸고 싶은 새로운 관념을 자신으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궁극적 목표와 하나가 되었다는 생각 속에 의식을 두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미 원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사실로 받아들인 것은, 비록 지금은 현실로 드러나지는 않았을지라도, 계속 그 믿음을 유지한다면 현실로 드러날 겁니다.

여러분의 낡은 자아관념인 바라바를 놓아주고 성공적으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했는지, 즉 새로운 자아관념을 확고히 하는 것에 성공했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게 여러분이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떠올려보면 됩니다. 즉, 여러분이 그 사람들을 볼 때, 이전에 봐왔던 그대로 그들을 보고 있다면 자아관념이 바뀌지 않은 겁니다. 왜냐하면 자아관념이 변화하면, 여러분과 세상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도 반드시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볼 때, 마치 우리가 이미 원하는 모습이 된 것처럼 그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모습을 상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자아관념을 바꾸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여러분의 새로운 자아관념을 반영하여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면, 먼저 그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바라볼지 마음속으로 그려야 합니다.

우선 여러분이 원하는 이상을 명확히 하십시오. 그러면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후에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이제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긴장을 풀고 잠과 비슷한 상태 속에 빠집니다. 그리고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다면 겪을 만한 일을 마음 안에서 경험하십시오.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다면 겪을 만한 것들을 상상 속에서 경험해보는 이런 간단한 방법을 통해서 여러분은 도둑인 바라바를 풀어주고 구세주, 즉 여러분의 이상을 십자가에 못 박아 세상에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4. 겟세마네 동산

이젠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계실 때의 이야기로 넘어가보겠습니다. "동산"은 황폐한 땅이 아닌, 잘 준비된 장소를 상징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곳에 와서 마음에 관한 공부를 함으로써 겟세마네라고 불리는 땅을 준비하는 중입니다. 좋은 문학책들을 읽고 아름다운 음악들을 듣고 품격 있는 대화를 하면서 마음을 적절하게 준비하는 일에 매일 시간을 할애하십시오. 사도서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형제들아, 무엇이든지 참되고, 무엇이든지 정직하며, 무엇이든지 의롭고, 무엇이든지 순수하며, 무엇이든지 사랑스럽고, 무엇이든지 칭찬받을 만한 것이 있거든, 그 덕과 칭찬할 만한 것들을 생각하라." [빌립보서 4:8]

우리 이야기로 돌아와서, 요한복음 18장을 보면 예수께서 동산에 있을 때, 갑자기 군중들이 그를 찾기 시작합니다. 그는 어둠 속에 선 채 말합니다. "누구를 찾고 있는가?"

유다가 대표로 대답해 말하기를, "우리는 나사렛의 예수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자 음성이 들립니다.

"나는 그이다.(I am He)"

그러자 그 자리에서 수천 명이 땅에 쓰러집니다.

여기서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이 이야기는 바깥세상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켜 드립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단지 자신이 찾던 사람이라고 주장함으로 수천 명이 땅에 쓰러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내용을 보면 그 사람들은 땅바닥에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정을 되찾았을 때, 같은 질문을 다시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그(He)라고 말했다. 만약에 그대들이 나를 찾는다면, 그들의 길을 가게끔 하라." [요한복음 18:8]

"그리고는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니, 그대가 하고자 하는 것을 속히 하라." [요한복음 13:27]

속히 일을 해야 했던 유다는 나가서 자살을 하게 됩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잠과 비슷한 상태 속에 있는 동안 의식을 조절할 수 있고 의식이 목적으로 삼은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겟세마네 동산에 있다고 말할 수 있고, 달리 말하면 마음을 준비시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태 속에 있다면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 있는 겁니다.

하지만 공상에 빠지지 않거나 생각에 끌려 다니지 않는 상태 속에서 고요히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여러분 의식이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고 구상했던 일정한 장면 안에서 노력 없이(without effort) 머물러 있으면서 그 상상속의 행동들을 한정시키고, 보는 것에 믿음을 유지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겟세마네 동산에 있는, 확실히 훈련된 존재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유다의 자살이란 자아관념이 바뀌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만약 원하는 것을 발견했다면 여러분의 예수님이자 구세주를 발견한 겁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존재가 된 것처럼 행동한다면 여러분의 이전의 관념들은 죽고(유다의 자살) 예수로서 살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저를 만났고 여러분 현재모습으로부터 구원될 방법을 만났기 때문에 이제는 현재의 모습과 그 존재가 세상 밖으로 표현하던 모든 것들을 떠나보내십시오. 그것들로부터 떠나십시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아를 죽이십시오.

과거의 자신은 죽음으로 인도하고 누구도 보지 못했던 진정한 자신의 모습에 생명을 주십시오. 이는 여러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과 같습니다. 이전까지 생명을 주었던 것들을 의식에서 떠나보내면서 이전의 존재는 죽음을 맞이하고, 여러분의 동산에서 발견했던 것들에 생명을 줍니다.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의 구세주를 발견합니다.

실제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도 없으며 누군가를 배신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의식에서 낡은 것들을 보내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것에 초점을 다시 맞춘 여러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지금부터 원했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새로운 자아의 모습에 믿음을 유지해 나간다면 여러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겁니다. 그 누구도 여러분의 목숨을 빼앗지 않습니다. 단지 스스로가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을 뿐입니다.

이것은 모세의 죽음과 비교해야만 합니다. 모세는 완벽하게 죽어서, 누구도 그가 묻힌 곳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이것과 유다의 죽음을 비교해 보십시오. 유다는 예수라는 사람을 배신한 사람이 아닙니다. 유다라는 말은 찬양을 뜻합니다. 찬양하는 것, 감사를 표현하는 것, 기쁨에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 바로 유다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기쁨으로 환호성을 지르기 위해서는 애타게 찾고 있는 것과 하나 되어 그것을 실현시켜야 할 겁니다. 원하던 것이 이루어졌다면 기쁨을 억누를 수 없을 겁니다. 마치 그 기쁨은 구약에서 여리고로 묘사된, 향기로운 냄새처럼 솟아날 겁니다.

저는 성경의 모든 이야기들이 고대인들이 동일한 이야기를 하려 했다는 것을 보여드리려 합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원하는 모습이 되는 방법입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들에서 타인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는 데에 있어서 타인의 도움은 필요치 않습니다.

5. 여호수아서와 라합

이제 우리는 구약에 나오는 독특한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연단에서 언급할 만큼 대담한 사제들이나 랍비들은 거의 없을 겁니다. 여러분이 여기서 약속을 받은 것처럼 이 이야기에서도 약속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예수(Jesus)입니다. 고대인들은 요수아(Joshua), 여호수아 벤 눈(Jehoshua Ben Nun) 또는 구세주, 물고기의 아들, 깊은 물속의 구세주라고 부릅니다. 눈(Nun)은 물고기를 말하고 물고기는 깊은 물속에 살고 있습니다. 여호수아(Jehoshua)는 여호와(Jehovah)가 구원한다는 뜻이고, 벤(Ben)은 자손(offspring) 또는 '~의 아들(son of)'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물고기 시대를 가지고 온 사람이라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성경의 여섯 번째 책인 여호수아서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약속을 받은 것처럼 여호수아 역시 약속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가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은 그대의 것이나이다." [요한복음 17:7] "그리고 모든 나의 것은 그대의 것이고, 그대의 것은 나의 것이나이다." [요한복음 17:10]

여호수아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발이 밟는 모든 땅을 내가 너에게 주었느니라." [여호수아서 1:3]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약속이라는 것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우리의 물리학적인 지식으로는 진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관련한 법칙 안에서 바라본다면 진리가 됩니다. 여러분이 마음 안에서 어떤 곳에 서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지 현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그가 밟을 수 있는 곳 어디나, 그의 발 하나가 닿는 곳 어디나 그 땅이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여리고라 부르는,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상태이자, 향기로운 도시이자, 기쁨에 넘치는 상태를 원했습니다.

여리고는 통과할 수 없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바깥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여호수아 역시 여리고의 바깥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3차원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보면서 4차원 세상에는 다다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4차원 세상에는 우리들의 소원이 이미 구체적이고 명확한 실체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다만 감각이라는 것이 그 세상을 갈라놓고 있어서 원하는 곳에 다다를 수 없는 듯 보입니다. 이성도 그곳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고 주변의 모든 것들 역시 마음속의 세상은 실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 창녀이자 스파이인 라합이라는 여인의 도움을 받습니다. 라합(Rahab)은 아버지의 영을 말합니다. '레이스(RACE)'는 숨결 또는 영을 말하고 '압(AB)'은 아버지를 말합니다. 이 창녀는 아버지의 영이며, 아버지는 인간의 의식, 즉 'I AM' 의식입니다. 느낄 수 있는 능력,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위대한 영이자 이 이야기 속에서의 라합입니다.

라합은 두 가지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스파이이고 다른 하나는 창녀입니다. 스파이가 하는 일은 이렇습니다. 은밀하게 돌아다니는 것, 아주 은밀하게 다녀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겁니다. 아주 은밀하게 다녀서 완전하게 자신을 감출 수 있는 스파이는 외부 세상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스파이가 아주 영리해서 자신이 하고 있는 것들을 감추고 정말 잡히지 않을지 모르지만 항상 잡힐 위험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고요하게 앉아 있을 때, 그 누구도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어느 곳에 있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런던에 있을 수 있습니다. 런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눈을 감고 실제로 런던에 서 있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 상태를 충분히 유지한다면 제 주변의 환경들은 정말 단단하고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실처럼 펼쳐집니다. 이때 육체는 지금 여기 그대로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다른 곳에 가 있는 겁니다. 즉, 저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바로 이곳으로 만들었습니다. 스파이처럼 몰래 가지는 않습니다. 다만 생각 속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이곳으로 만들고, 나중에 일어날 일을 지금 현재 속에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저의 의식이 런던에 가 있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육체적인 모습만을 보고는 제가 잠에 들었고 지금 샌프란시스코, 즉 이 3차원적인 세상 안에 그대로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라합의 두 번째 직업은 창녀입니다. 창녀로서 그녀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요구하는 것을 모두 들어줍니다. 사람들의 요구가 정당한지 묻지 않고, 그저 들어주는 것이 그녀의 일입니다. 만약 그녀가 이름처럼 완벽한 창녀라면, 그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녀는 섬기기 위해 존재하며, 사람들의 요구가 정당한지 따지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이 성취되기까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루어질지는 모르지만 여러분 내부에는 그 지위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런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이런 저런 능력들이 필요하다 말하지만, 그런 능력들 없이 그냥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느낌을 사실처럼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의식 속에서 원하는 것을 가질 때, 스파이를 고용한 겁니다. 그리고 원하는 것들을 자아에 보냄으로써 여러분 안에서 그 상태들을 실현시킬 수 있습니다. 창녀는 자신을 찾는 사람을 만족시키듯, 여러분도 스스로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원하는 존재가 이미 되었다는 느낌을 취함으로써 스스로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느낌을 계속 진실로 받아들인다면, 비록 지금은 현실에 나타나지 않고 이성과 감각들이 현실이 아니라고 말할지 몰라도, 결국에는 그 모습을 현실에 드러낼 겁니다. 상상하는 것들이 실제와 같이 구체화된 상상이어야 여러분은 만족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만질 수도 없는 것으로 느끼고 구체적인 실체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좌절하게 될 겁니다.

이 이야기에서 라합이 도시에 들어가 정복할 때, 그녀에게 주어진 명령은 도시의 심장부로 들어가 그곳에서 여호수아가 올 때까지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집에서 집으로 다니지 말고, 네가 들어간 집의 위층을 떠나지 말라. 만약 네가 그 집을 떠난다면, 그 피는 네 머리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을 떠나지 않으면, 피는 내 머리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명령을 받았습니다.

라합은 집으로 들어가 위층으로 가서는 여리고를 둘러싼 벽들이 무너지는 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최상의 상태로 나아가려면 항상 고양된 기분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베일에 싸인 방법으로 벽들이 무너지고 여호수아가 그 도시로 들어왔을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스파이면서 창녀인 라합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해줍니다. 여러분에게는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바로 이곳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당신은 진실이라고 대담하게 여기는 것을 자신에게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들은 결코 잃지 않을 겁니다. 이 이야기는 창녀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벽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설명은 간단합니다. 나팔이 7번 울리고 7번째 나팔 소리에 벽이 무너지자 여호수아는 그가 원했던 여리고 안으로 승리의 기쁨에 싸인 채 들어갔다고 합니다. 7이라는 숫자는 정적, 휴식, 안식일을 말합니다. 원하는 것이 이미 존재한다는 확신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원하는 것을 성취했다는 느낌을 사실로 받아들여 다른 것에 흔들리지 않고 분산되지도 않는 상태 속에서 잠에 든다면, 정신적인 휴식에 들어간 것이고 정신적인 안식일을 거행하고 있는 중이자 7번째 나팔을 불고 있는 중입니다. 벽들은 무너집니다.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들은 바뀌고 내가 사실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맞춰서 재건됩니다. 주변 환경들은 무너지고 내 마음속에 지녔던 것들은 부활합니다. 내 안의 고요 속에 도달할 때, 나를 둘러싼 벽들, 즉 장애와 문제는 스스로 무너져 내립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의 생각을 고정시켜, 세상이 그 생각을 부정하더라도 그 생각에 충실하게 남아 있는 사람은 결국 그 생각이 실현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생각을 잡고 있는 것'과 '생각에 잡혀 있는 것'은 결과적으로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생각에 지배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이미 그것인 것처럼 마음을 채우십시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든, 여러분의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영상을 따라 길을 걸어가게 될 겁니다.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을 따라 여러분은 걷고 있는 중입니다.

어젯밤에 말씀드린 대로, 진정한 자신의 것 중 유일하게 선물로 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그것은 여러분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 이외에는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그것을 내주어야 합니다. 창조의 과정은 이미 끝났으므로 그것은 여러분 안에 존재합니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이미 여러분의 것이고 창조는 끝났기 때문에 더 이상 새롭게 창조해야 할 것은 없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어떤 한 장소에 서 있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원하는 장소 어디에도 갈 수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원하는 장소에 가 있다는 말은, 지금 이 순간 눈을 감고 이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를 마음 안에 그린 후에, 그곳에 실제 있다는 느낌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정말 실제인 것처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눈을 떴을 때, 상상 속에서 실제로 느꼈던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아마 놀랄지도 모릅니다.

원하는 상태 속으로 빠져든 후에 실제와 같은 느낌을 갖는 이런 정신적인 여행은,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데에 필요한 전부입니다. 여러분 내부의 차원적으로 더 거대한 자아는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길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차원적으로 작은 자아, 다시 말해 3차원적인 자아는 그 길을 알지 못합니다. 더 나아가 여러분 안의 거대한 자아에게 있어서는 여러분이 사실로 받아들인 것을 실현시키는 모든 방법들이 선합니다.

마음속에서 여러분의 목적을 뚜렷하게 유지해서 그것들이 현실과 같은 느낌을 갖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하늘과 땅의 모든 힘들이 그것을 이루기 위해 쏟아 부어질 겁니다. 거대한 자아는 마음속의 확고한 영상을 실현시키는 데에 필요한 것이라면 사람들 모두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미칠 겁니다.

6. 민수기의 예배당과 구름

이제 민수기로 넘어가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하나를 보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여러분 중 몇몇은 여기 민수기에서 묘사한 경험을 가져봤을 거라 생각합니다. 살펴볼 내용은 하느님께서 예배당을 만들라는 명령을 하는 부분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자기 자신을 예배의 장소로 만들라 명령했습니다.

예배당 모습에 관한 모든 세세한 사항들을 하느님께서 말씀해주십니다. 길어야 하며 움직일 수 있는 찬양의 장소여야 하며 가죽으로 뒤덮여 있어야 합니다. 더 말할 필요 있을까요? 사람 아니겠습니까?

"너희가 하느님의 사원임을, 그래서 하느님의 영이 네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을 모르느냐? [고린도전서 3:16]

다른 사원이란 없습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사원입니다. 이 사원은 길어야 하며 가죽으로 뒤덮여 있어야 하며 사막을 가로 질러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당이 세워지던 낮 동안에는 구름이 예배당, 즉 증거의 천막을 덮었고, 저녁에는 불의 모양 같은 것이 아침까지 있더라. 그래서 낮에는 구름이 덮여 있고, 저녁에는 불의 모양이 덮여 있더라." [민수기 9:15, 16]

낮 동안에 구름이 올라갈 때까지, 그리고 저녁 동안에 불이 올라올 때까지는 머물러 있으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아니면 일 년이든지 구름이 예배당 위에 머무를 때면,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그들의 천막에서 머물고 여행을 하지 않더라. 그러나 구름이 걷히면, 그들은 이동하였다." [민수기 9:22]

여러분 자신이 예배당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구름은 무엇인지 궁금할 겁니다. 하지만 명상 중에 여러분 중 다수가 이것을 봤을 거라 생각됩니다. 명상 중에 마치 우물의 지하수 같은 이 구름이 자연스럽게 머리 위로 올라와서 고동치는 황금색 고리를 형성합니다. 그 다음 잔잔한 강처럼, 살아있는 황금색 고리의 물결이 머리에서 흘러나갑니다.

잠에 들기 전에도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그 구름은 솟아오릅니다. 바로 이 졸린 상태에 들어설 때,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원하는 것을 가졌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구름은 여러분이 사실로 받아들인 것을 현실로 받아들여서, 받아들인 사실에 맞추어 현실을 만들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구름은 간단하게 말해 의식의 옷입니다. 그래서 구름은 여러분의 의식이 놓인 곳에 있게 되고, 결국은 여러분의 몸뚱이도 의식이 머문 곳에 놓이게 될 겁니다.

이 황금빛 구름은 깊은 침묵 속에서 나타납니다. 잠에 가까워질 때, 그것은 매우 짙고, 매우 유동적이며, 살아있고 고동치는 느낌이 듭니다. 졸린 상태, 깊은 침묵 상태, 잠과의 경계선 상에 있을 때, 그것은 머리 위로 솟아오릅니다. 그 구름이 올라오기 시작할 때까지 여러분은 예배당을 철거하거나 움직이지 않습니다.

졸린 상태에 도달할 때, 그 구름은 항상 솟아오릅니다. 사람이 잠에 들 때면, 그가 알든 모르든, 3차원적인 세상에서 4차원적인 세상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때 무언가가 솟아오르는데, 그것은 인간의 의식으로, 더 거대한 시선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바로 4차원적인 시선입니다.

그때 여러분이 보고 있는, 솟아오르는 것은 여러분 내부의 거대한 자아입니다. 그 구름이 올라가기 시작할 때, 여러분은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다는 느낌을 현실처럼 가져야 합니다. 바로 이 구름이 솟아오르는 때가 원하는 존재가 이미 되었다는 분위기 속으로 자신을 달랠 시간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상상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다면 현실에서 경험했을 법한 일들을 체험하거나, 이미 이루었다는 느낌을 주는 짧은 문장을 반복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정말 놀라워! 정말 놀라워!" 같은 문장을 계속 반복하십시오.

"깊은 잠에 빠졌을 때, 꿈속에서 그리고 밤의 환영 속에서 그분은 인간의 귀를 열어, 그들에게 할 지시를 봉인하신다." [욥기 33:15,16]

잠들기 직전의 시간을 현명하게 쓰십시오. 소원이 성취되었다는 느낌을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그 분위기 속에서 잠자리에 드십시오. 밤에, 차원적으로 더 거대한 세상 속에서,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사람들은 이 땅에서 후에 상영될 드라마들을 보고 그 역할들을 연기합니다. 내부의 거대한 자아가 읽고 연기한 대로 이 땅위의 드라마, 즉 현실은 펼쳐집니다. 자유의지라는 환상은 단지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원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잠에 빠졌을 때 마음을 지배하는 감각들은, 지금 당장은 현실이 아닐지라도, 곧 현실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잠에 들 때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다는 느낌을 가정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게 "현실이 되어라!"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이루는 모든 수단들에게 명령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원하는 모습이 됩니다.

저는 수많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을 때에도 잠들기 전, 저 자신을 그곳에 있다고 상상하면 상황이 빠르게 변해서 결국 그곳으로 가게 된 경우를 많이 겪었습니다. 밤에 잠을 잘 때, 원하는 여행지에서 잠에 든 것처럼 상상을 했습니다. 아침이 되자 상황들은 제가 상상했던 것에 맞춰서 스스로를 만들어 갔고, 주변 모든 상황들은 제가 현실에서 그 여행을 하게끔 변해갔습니다. 저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잠들었을 때 상상했던 장소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해야만 했습니다.

구름이 솟아오를 때,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된 것처럼 혹은 가기 원하는 장소에 이미 있는 것처럼 상상합니다. 그런 후에 그 상태 속에서 잠에 듭니다. 그러면 제 주변 상황들은 예배당을 철거하고 주위 환경들을 철거하고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건너서 환경들을 새로 만들어, 상상했던 것과 비슷한 곳으로 새로 만듭니다. 성경의 이 내용은 물질적인 사막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주변에 펼쳐진 이 넓은 세상 모두가 사막입니다.

우리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마치 사막을 걷듯이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살아있는 예배당이 있고, 우리가 잠들거나 잠에 가까운 상태에 있을 때 구름이 예배당을 덮고 솟아오릅니다. 그 구름은 꼭 이틀이 걸리는 것은 아니고 2분에라도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왜 이틀이라고 말을 했을까요? 내가 오늘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면, 어쩌면 내일은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을 겁니다. 이동하기를 결정하기 전에 적어도 하루의 시간을 줘야만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 예배당을 가지고 이동하기로 결정했을 때, 이틀이나 한 달이나 일 년 안에 구름을 솟아오르게 하였습니다. 구름이 솟아올랐을 때, 여러분은 구름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구름은 말하자면 여러분의 생각, 즉 의식의 옷입니다. 의식이 가는 곳에 여러분의 육체를 갖고 갈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 뜻과 상관없이 육체는 그곳으로 저절로 끌려 올 겁니다. 의식이 머무르고 있는 곳을 향해 육체가 움직이도록, 모든 상황들은 일어날 겁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많은 거처가 있느니라.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너희에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마련하러 가노라.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리니,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리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많은 거처가 있느니라.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너희에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마련하러 가노라.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리니,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 3]

여러분은 하느님이 머무는 집이라 말할 수 있으니, 많은 거처들은 여러분 마음속의 수많은 상태들을 말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수많은 자아에 대한 관념들이 있습니다. 그 영원함 속에서 고갈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모습이 된다 해도 영원함 속에서 어떤 것도 고갈되지 않을 겁니다.

고요히 눈을 감고 자신이 어떤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그곳에 가서 그 처소를 준비한 겁니다. 그러다 눈을 뜨게 되면 자신이 처소를 준비하러 갈 때 두고 간 이 육체로 다시 돌아오게 되고, 마음속에서 준비했던 장소는 사라집니다. 하지만 적당한 시간이 되면 준비해두었던 장소로 육체를 가지고 가게 될 겁니다. 여러분이 마음속에서 준비해둔 그 장소로 가기 위해, 어떤 경로와 방법들을 거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고요히 앉아서, 여러분이 어떤 곳이든지 마음속에서 현실처럼 만들어 내십시오.

그러나 이것을 너무 경솔하게 사용하지 마십시오. 이것을 경솔하게 사용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잘 알기 때문에 주의를 드립니다. 저 역시 단순히 날씨 때문에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어서 경솔하게 다뤘던 적이 있습니다. 뉴욕의 한 겨울이었습니다. 너무 추워서 인도제도의 따뜻한 날씨를 원해, 제가 야자수 나무 밑에 자는 것을 상상하면서 잠에 들었습니다. 그 다음날 눈을 떴을 때, 제가 있는 곳은 여전히 추운 겨울 날씨 속의 뉴욕이었습니다.

저는 그 해에 인도제도에 갈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슬픈 소식이 날아와서 그곳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그때는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배들이 침몰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듣고 48시간 후에 배를 타고 뉴욕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 소식만이 유일하게 저를 바베이도스에 가게끔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저는 늦기 전에 도착해서 어머니의 3차원적인 육체에게 "안녕"이라는 작별인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인도제도로 나갈 계획이 없었지만, 내부 깊은 곳의 자아는 거대한 구름이 내려앉은 곳을 보았습니다. 그 구름은 바베이도스에 내렸고, 저의 몸인 예배당은 "너의 발걸음이 닿는 곳 어디라도, 나는 그것을 너에게 주었다."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됩니다. 구름이 사막 어디에 내려앉더라도, 그곳에서 여러분은 예배당을 새로 만들게 될 겁니다. 저는 한밤중에 배가 침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뉴욕을 떠났습니다. 저는 반드시 가야만 했습니다. 제가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상황들은 전개됩니다.

주의하십시오. 경솔하게 이것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작동하는지 시험 삼아 나를 래브라도로 가게 해보자." 이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래브라도에 가게 될 것이고, 이 수업에 참석한 것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자기 전에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느낌을 취해나간다면 그 법칙은 작동할 겁니다.

잠자리에 들 때 여러분의 마음을 조절하십시오. 이 기법을 부르기에 가장 적당한 말은 "통제 가능한 깨어있는 꿈"일 겁니다. 꿈속에서는 통제력을 잃습니다. 따라서 완벽하게 통제 가능한 깨어있는 꿈을 가지고 잠들기 전의 상태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진짜 꿈속에서 여러분이 주인공이듯, 그렇게 주인공으로서 깨어있는 꿈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꿈속에서 여러분은 항상 배우일 뿐, 관객이 아닙니다. 통제 가능한 깨어 있는 꿈에서도 여러분은 배우가 되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동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행동한 것들은 3차원적인 세상 속에서 육체를 가지고 반드시 재연되기 때문에 경솔하게 다루지 마십시오.

자, 이제 침묵의 시간에 들어가기 전에 분명하게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난밤에 말씀드렸던 노력이라는 것입니다. 이 넓은 세상 속에서 사람들이 실패하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현대의 심리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노력하고 있는 것과 상반된 결과가 일어나는 법칙(the law of reverse effort)'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이루어진 느낌을 사실로 받아들일 때, 최소한의 노력으로 해야 합니다. 여러분 의식의 방향을 통제해야 하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해야 합니다. 통제를 할 때, 특정한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여 억지로 하려 한다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겁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얻게 될 겁니다.

그것은 왜 아담이 잠에 든 것을 가지고 성경의 기초를 세웠는지를 설명합니다. 잠에 든 것은 창조행위의 첫 걸음이고, 성경 어디에서도 그 깊은 잠에서 이제껏 깨어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가 잠자는 동안에 창조는 멈춥니다.

여러분이 잠과 비슷한 상태에 들어가 생각을 조절할 때가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최적의 시간입니다. 그래야 노력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잠과 비슷한 상태 속에서 여러분 의식은 충분히 이완됩니다. 그때 억지로 하려 하거나 노력을 기울이지 말고 그 느낌 속에서 의식을 유지시키는 것을 연습해봐야만 합니다.

한 순간이라도 의지의 힘으로 이런 일들을 해낸다는 오해를 하면 안 됩니다.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와 하나가 될 때, 의지적으로 그렇게 되려 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된 것을 인식하는 겁니다. 그것이 해야 할 일 전부입니다.

7. 기도의 기법

이제 오늘밤 가장 중요한 시간인 기도의 시간을 맞아, 우리가 사용할 기법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우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람이 이루어진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사건을 구상하시고, 그 사건을 하나의 단일한 행동으로 한정시키십시오. 예를 들어 제가 어떤 사람과 악수를 하는 사건을 골랐다면, 악수하는 것 하나만을 해야 합니다. 악수를 한 후에 담배에 불을 붙이고 수많은 그 외의 일들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단순하게 현실처럼 느껴질 때까지 실제 악수를 하는 것을 계속 반복해야 합니다.

상상하고 있는 사건은 항상 바람이 이루어진 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사건을 구상할 때, 원하는 것이 성취된 후에 자연스럽게 마주칠 만한 사건을 구상하십시오. 실현하길 원하는 사건이 무엇인지 결정하십시오.

어젯밤에 말씀드린 또 다른 기법이 있습니다. 만약 상상 속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에 집중하지 못하겠다거나, 지금 의자에 딱 달라붙은 채로 이 의자가 다른 곳에 있다고 믿지 못한다면 이렇게 해보십시오. 성취되었을 때의 느낌을 정리해서 그것을 하나의 단순한 문장인 "끝내주는데." 또는 "감사합니다." 또는 "해냈어." 또는 "끝냈다!" 등으로 축약해 만드십시오.

세 단어 이상으로 만들지 말고, 원하는 것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만드세요. "끝내주는데.", 또는 "감사합니다.", 등은 제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물론 이 문장들 말고 다른 것들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겁니다. 자신의 어휘를 이용해서 여러분에게 맞는 문장을 만드십시오. 아주 짧은 문장으로 만들어 원하던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내십시오.

마음속에 자신만의 문장을 만든 후에 구름을 올라오게 하십시오. 쉽게 말하자면 잠과의 경계선 상으로 들어가서 구름을 올라오게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단순하게 여러분이 잠에 들었다고 상상하고 느끼세요. 이 상태 속에서 바람이 이루어진 느낌을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그리고 마치 자장가처럼, 그 짧은 문장을 반복하십시오. 그 문장이 무엇이든, 생각한 것이 진실이고 현실이고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자, 이제 긴장을 풀고 원하는 모습이 실제로 되었다는 느낌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여리고를 여러분에게 넘겨줄 힘을 가진 스파이와 함께, 여리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또한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 후에 부활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제 다른 것들은 그들의 길을 떠나도록 만들고 이미 원하는 것이 실제로 되었다는 느낌 속으로 들어선다면, 이 모든 성경의 이야기들을 여러분이 재연하게 됩니다. 자, 이제 침묵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침묵의 시간

8. 명상 후 징후

이 명상을 하고 나서 손과 입술이 마른다면, 구름을 솟아오르게 하는 일을 성공했다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구름이 솟았을 때 어떤 생각을 하는가는, 전적으로 여러분 소관입니다. 그런데 손이 건조해져 있다면 구름을 솟아오르게 하는 것에 정말 성공했다는 증거입니다.

또 다른 굉장히 특이한 현상이 있는데, 저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깊은 명상 속으로 들어가면 나타납니다. 명상 속에서 깨어났을 때, 굉장히 활발하게 신장이 활동하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의사와 이야기를 해봤는데 그들도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명상 중에 관찰할 수 있는 또 다른 것은 매우 아름답게 빛나는 투명한 푸른빛입니다. 세상의 것과 가장 비슷한 것을 찾아본다면 불타고 있는 알코올일 겁니다. 크리스마스 날 자두 푸딩에 알코올을 넣어서 불을 붙인다면 사랑스럽고 투명한 푸른빛이 푸딩을 감싸게 됩니다. 불어서 끌 때까지 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불꽃이 명상 중에 머리 앞에 나타나는 푸른빛과 가장 유사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그걸 보게 된다면 제가 지금 여러분에 말씀드리고 있는 푸른빛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겁니다. 불타는 알코올처럼, 어두운 푸른색과 밝은 푸른색의 두 가지 색조의 푸른색이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있어서 가스를 분사할 때 나오는 균등한 색깔의 불꽃과는 다릅니다. 마치 영이 살아 움직이듯, 이 불꽃도 살아 움직입니다.

또 다른 건, 저한테 나타났던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나타날 겁니다. 눈앞에서 점들을 보게 될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간반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잘 알지 못하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점들이 한 데에 묶여서 작은 원을 이루어 그물처럼 공중에서 떠다닙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점으로 시작해서 다양한 기하학적인 패턴을 지어 그룹으로 나타납니다. 벌레들 같기도 하고 트레일러들 같기도 한데, 그것들이 여러분 얼굴 위로 떠다닙니다. 눈을 감아도 이것들을 여전히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이것들이 외부로부터 나타난 것이 아닌 내부의 것임을 보여줍니다.

의식 속에서 확장해 나가기 시작할 때, 이런 현상 모두가 나타날 겁니다. 이것은 피의 흐름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에 의해서 눈으로 보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피가 흐르는 것이 눈에 보이게 된 것일 수 있다는 말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이 간반이라든가 어떤 어이없는 것들이라 생각하면서 쓸데없는 고민을 하지는 마십시오. 그래서 이런 다양한 현상들이 다가온다면, 잘못된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면서 그 동산을 일구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의식 속 확장의 과정입니다.

깨어있는 동안에 생각들을 주시하고 관찰해서 마음을 훈련시키기 시작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 생각에 대한 경찰이 됩니다. 불쾌한 대화 속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타인을 험담하는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여 듣는 것을 거부하십시오.

여러분 마음의 눈을 통해 어리석은 처녀의 모습을 그리지 말고 현명한 처녀의 모습을 그리십시오. 들었을 때 기쁨을 가져오는 것만을 들으십시오. 불쾌한 것들, 듣고 후회할 만한 일들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의 램프에 기름이 없는 것, 즉 여러분 마음 안에 기쁨이 없는 가운데 들리는 데로 듣고 보이는 데로 보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두 종류의 처녀에 대해서 말합니다. 다섯 명의 어리석은 처녀와 다섯 명의 현명한 처녀입니다. 현명한 처녀가 되거나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때 앞서 설명했던 현상들이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앞서 말했던 것들을 경험해 본다면 정말 흥미로운 경험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시야를 발전시키는 데에 시간을 낭비하려 하지 않을 겁니다. 여기 있는 분들 모두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들을 이야기하는 데에 커다란 즐거움을 찾으신다면 이 위대한 일들과 하나가 되지 못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