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하느님(GOD) 또는 여호와(Jehovah)로 번역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을 지칭할 때 쓰는 예수(Jesus)라는 이름입니다. 고대인들은 약간의 상징들을 사용해 이 이름들을 만들었습니다. 히브리어라고 불리는 고대 언어는 단지 의사소통을 위해서 고안된 문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발음할 수 없는 신비로운 언어입니다. 수학자들이 더 높은 수학의 상징들을 이해했던 것처럼, 히브리어를 이해했던 사람들은 더 높은 히브리 언어의 상징들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영어가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로 쓰이는 것과 달리, 히브리어는 생각을 전달하는 데에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고대인들은 신의 이름을 욧 헤 바 헤(JOD HE VAU HE)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해서 이 상징들을 설명하겠습니다.
신의 이름 중에서 첫 번째 문자인 욧(JOD)은 손 또는 씨앗을 말합니다. 그냥 손이 아니라 창조자의 손입니다. 만약에 창조자와 그가 창조한 세상을 구분 지을 수 있게 하는 것을 인간의 신체 기관 중에 고르자면, 그것은 바로 손이 될 겁니다. 유인원에게 있는 손과는 다릅니다. 유인원의 손은 음식을 먹을 때나 나무를 타기 위한 목적으로 쓰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손은 무언가를 만들고 어떤 형상을 짓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손이 없다면 진정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지칭하는 손은 만들어내는 자의 손이자 창조자의 손입니다. 이 손은 세상 속에서 만들 것을 정하고 형상을 짓고 창조할 수 있습니다. 고대에 성경을 쓴 사람들은 첫 번째 문자 욧(JOD)을 일컬어 손 또는 모든 창조물들이 태어나는 궁극적인 씨앗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문자인 헤(HE)로 넘어가보면, 고대인들은 헤(HE)에 창문의 상징을 주었습니다. 창문은 눈입니다. 인간의 몸에는 눈이 있는 것처럼, 집에는 창문이 있습니다.
세 번째 문자인 바(VAU)에는 못의 상징을 주었습니다. 못은 물건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접속사 "AND"는 세 번째 문자인 바(VAU)로 씁니다. 만약에 "남자와 여자"라고 말하고 싶다면, 가운데에 바(VAU)를 넣어서 두 개의 단어를 연결합니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문자인 헤(HE)는 또 다른 창문 또는 눈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것들을 설명한다면 눈이며 창문이며 손 등의 방금 설명했던 방식은 잊고,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기에 앉아 있습니다. 첫 번째 문자인 욧(JOD)은 여러분의 인식인 IAMness(역주. 나의 존재, 나의 의식을 뜻하는 사전에 없는 뜻. I + am + ness를 합성한 단어)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그것은 첫 번째 문자입니다. 이 인식으로부터 인식하고 있는 모든 상태들이 나옵니다. 눈이라고 불리는 두 번째 문자인 헤(HE)는 여러분의 마음 안에서 무언가를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인 마음속에 상(像)을 그리는 능력입니다. 여러분은 자신 이외의 어떤 것을 상상하거나 인지합니다. 여러분이 생각 속에 푹 빠져 있을 때에도 생각하는 자인 여러분 자신과 생각하고 있는 대상들이 구분된 존재로서 존재합니다.
세 번째 문자인 바(VAU)는 그렇게 생각한 대상을 나라고 느끼는 능력입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존재가 이미 되었다고 느낄 때, 바로 그 존재를 자신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된 것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행동한다면 상상의 세계에서 원하는 것들을 끄집어내어 그것에 바(VAU)를 끼워 넣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창조의 드라마가 완성됐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무언가를 인식하고 나서는, 실제로 이미 그 모습이 됐다고 인식했습니다.
신의 이름 중에 마지막인 네 번째 문자는 또 다른 눈인, 헤(HE)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을 눈에 보이는 외부적인 세상 속으로 드러내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은 외부적인 세상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이라고 인식한 것에 맞춰, 외부적인 세상은 항상 스스로를 건설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욧 헤 바 헤(JOD HE VAU HE)는 만물이 창조되는 이름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어떤 창조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 이름은 지금 여러분이 여기 앉아 있는 동안에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존재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정말 그렇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지금 자신 이외의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방이나 가구나 다른 사람들 같은 것 말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현재 자신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이 되기를 원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여러분이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소유하기를 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다른 모습이 되기를 원할 때, 여러분에게는 이미 그 모습이 된 것을 느끼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그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때, 신의 이름인 욧 헤 바 헤(JOD HE VAU HE)를 완성합니다. 마음속의 영상이 현실로 드러나는 일은 우리가 신경 쓸 바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미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눈앞에 나타납니다.
자, 다음으로 아들의 이름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세상을 지배하는 권능을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아들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에 나오는 그 위대한 요수아(JOSHUA), 예수(JESUS)입니다. 우리는 요수아(JOSHUA) 혹은 여호수아(JEHOSHUA)라는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영어로 예수(JESUS)라고 말합니다.
아들의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닮았습니다. 아버지 이름의 처음 세 글자인 욧 헤 바(JOD HE VAU)는 아들의 이름에도 있습니다. 아들의 이름 안에는 앞서 말씀드렸던 세 글자에다 쉰(SHIN)과 아인(AYIN)이 뒤에 붙어 욧 헤 바 쉰 아인(JOD HE VAU SHIN AYIN)이 됩니다. 앞의 세 글자인 욧 헤 바(JOD HE VAU)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습니다. 헤(HE)는 자신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을 인식하는 것을 말하고, 바(VAU)는 여러분이 인식하고 있는 것과 자신을 하나라고 인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상상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고 그 상상한 것과 하나 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세상에 대한 지배자입니다. 그것은 창조의 힘입니다.
그런데 왜 아들의 이름에는 쉰(SHIN)이란 것이 들어가 있을까요? 그것은 아버지의 무한한 자비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다.'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아버지가 인간이 되는 것을 의식했을 때, 아버지 그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무언가를 인간이라는 상태 안에는 넣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쉰(SHIN)을 이 목적으로 주었습니다.
쉰(SHIN)은 이빨을 상징합니다. 이빨은 먹어치우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 존재하는 것 중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먹어치울 수 있는 능력이 아들에게는 있습니다. 나의 무지로 인해 좋아하지도 않는 것을 태어나게 했고, 이제는 그것을 떠나보내기를 원합니다. 만약에 그것을 태워버릴 불꽃이 내 안에 없다면 내가 저지른 모든 실수들과 영원히 함께 살면서, 그런 것들을 만든 것에 대해 비난받게 될 겁니다. 그러나 아들의 이름에는 쉰(SHIN) 또는 불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속에 창조했던 것들로부터 아들을 떨어져 나가게끔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식 안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볼 수는 없습니다.
제가 만약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 지금 이 방을 인식하고 있는 상태로부터 벗어난다면, 저는 더 이상 방을 인식하지 않게 됩니다. 제 안에 방을 먹어 치워버린 무언가가 있습니다. 계속 다른 곳에 주의를 놓는다면 그 방은 오로지 나의 외부적인 세상 속에서만 살아 있을 뿐입니다. 아들에게 절대적인 지배력을 준 것은 그의 이름 속에 놓인 쉰(SHIN) 또는 이빨입니다.
왜 아버지의 이름에는 그것이 존재할 수 없는 걸까요? 간단합니다. 아버지 안에서는 어떤 것도 사라질 수 없습니다. 사랑스럽지 않은 것조차 사라질 수 없습니다. 한번 창조된 것은 아버지, 즉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차원적으로 더 위대한 자아 안에 영원히 간직됩니다. 그러나 나의 세상 안에서 모든 잘못들이 영원히 함께 살아있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이 되었을 때, 나의 무한한 자비로 나 자신에게 무지로 인해 내 세상 속에 만들어낸 것들과 분리될 수 있는 능력을 주었습니다.
이것들은 지배의 권능을 주는 두 개의 이름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위에 살면서 여러분의 의식이 하느님이고 만물의 근원이고 유일한 실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여러분에게는 지배의 권능이 주어집니다. 여러분은 어떤 새로운 모습이 되고 싶다거나 갖고 싶은 것에 대한 욕망이 있을 겁니다. 다행스럽게 여러분에게는 상상 속에서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다는 것을 느끼는 능력이 있고,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는 능력이 있습니다. 상상이 현실로 나타나는 마지막 결과는 3차원 마음의 능력을 넘어서 있습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그것들은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여러분이 마음의 눈 안에서 이들 두 가지 이름들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면, 그 이름들은 여러분의 영원한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은 욧 헤 바 헤(JOD HE VAU HE)이자 욧 헤 바 쉰 아인(JOD HE VAU SHIN AYIN)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들은 상상의 힘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실제로는 기도의 방법을 이야기로 만든 겁니다. 기도라는 것은 미래를 변화시키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차원적으로 더 작은 세상인,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을 변화시키기 위해, 인간이 차원적으로 더 넓은 세상 안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성경이 주고 있습니다.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만약에 기도가 아니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들이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인간은 행동을 하게 만드는 근원이자, 방향키를 쥐고 있는 마음이자, 기도를 이루어주는 자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들은 생각의 능력에 대한 기존의 믿음에 강력한 도전장을 던집니다. 성경은 마음에 관한 드라마일 뿐, 역사적인 사실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여러분 마음속에 각인시켜야 합니다. 약간의 상상력만 가미한다면 성경의 내용 안에서 마음에 관련된 통찰을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습을 따라 인간을 만들라.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바다의 고기들과 하늘의 새들과 가축들과 땅 위의 모든 것들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것들을 지배하게 하라.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으니, 곧 하느님의 형상 속에서 그를 창조하셨더라." [창세기 1:26, 27]
고대의 스승들은 성경의 첫 부분인 1장 안에 하느님과 인간은 하나이고, 인간은 모든 이 땅 위의 것들을 지배한다는 기본진리를 세웠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라면 하느님은 우리와 떨어질 수도 없고 심지어 가깝게 있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깝다는 말 자체에는 분리되어 있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무엇이지?"라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의식이자 인간의 인식이며, 인간의 IAMness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느냐는 것보다는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주변 환경들은 형성되기 때문에 인생의 드라마는 마음에 관련된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념이 세상 만물의 기초가 됩니다. 자신에 대한 관념대로 행동하게 되고, 자신에 대한 관념대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자신에 대한 관념이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고 그 외에 어떤 다른 것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관념이 달랐다면, 다르게 행동하고 다른 경험들을 했을 겁니다.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은 사실로 받아들인 대로 미래를 바꿉니다. 사실로 받아들인 것들은, 비록 당장 현실에서는 거짓처럼 보일지라도, 사실로 받아들인 느낌을 유지한다면 곧 그것은 현실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훈련되지 않은 마음은 현실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를 현실처럼 받아들이는 데에 어려움을 느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오감은 그 상상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각이 거부하고 있는 상태를 사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잠이나, 잠과 비슷한 상태에 들어가야 한다고 이 자리에서 말해도, 여러분은 이것들을 간단한 것으로 생각해서 어쩌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하느님(인간)께서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시니, 그가 잠에 들었더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의 갈비뼈를 하나 취하시고, 살로 거기를 채우시니라. 하느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하신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니라. 하느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하신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니라." [창세기 2:21, 22]
하느님이 남자를 위해 여인을 창조하기 전에, 아담에게 들판의 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을 데려와서 아담에게 이름을 짓게 했습니다.
"아담이 모든 생물들을 무엇이라 부르든지 그것이 그 이름이 되리라."
성경에서 창조를 일으키는 것으로 표현된 넓적다리에 대해서 성서의 색인이나 성경 사전을 찾아본다면 그것이 넓적다리와 관계없다는 것을 발견할 겁니다. 성경에 넓적다리로 나온 것은 넓적다리 위에 붙어 있는 창조할 수 있는 힘이 있는 말랑말랑한 부분(성기)을 말합니다.
성경을 쓴 사람들은 마음에 관한 위대한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런 남근숭배사상을 사용했습니다. 천사는 하느님의 메신저입니다. 여러분 의식이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하느님이 됩니다. 지금 여러분은 마음속의 이상, 즉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이상과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속에서 원하는 존재가 이미 되었단 것을 모르고, 또한 여러분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조차 믿지 못하기 때문에 싸움을 하고 있는 겁니다. 원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누가 천사와 씨름을 하였나요? 야곱(Jacob)입니다. 야곱은 찬탈자를 뜻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변화시켜 현재의 이성과 감각이 거부하고 있는 존재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모습과 하나 된 것을 느끼려고 애쓰면서 그것과 씨름을 하고 있을 때, 여러분 안에서는 야곱과 천사가 씨름을 하는 성경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이상과 하나가 되었다고 실제로 느끼게 되면, 어떤 것인가가 여러분에게서 빠져나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누가 나를 건드렸는가? 왜냐하면 나한테 힘이 빠져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상과 하나된 것을 느끼는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씨름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마치 어떤 육체적인 창조행위(성행위)를 마친 것처럼 그렇습니다. 성공적으로 기도를 한 후에는 육체적인 창조행위를 하고 난 후처럼 힘이 빠집니다. 여러분이 만족을 느끼게 되었다면 더 이상 갈구하지 않게 되는 원리와 같습니다. 만일 욕구가 계속 남아있다면 여러분 안에서 이상을 폭발시키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원하는 모습이 된 것을 성공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깊은 명상 속에서 깨었을 때에도 여전히 구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갈증은 남아있게 됩니다.
얼마 전까지는 원하는 모습이 되고자 간절히 원했지만 이제는 그것과 하나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면, 더 이상 그 모습처럼 되고자 하는 갈증은 사라집니다. 무언가가 나에게서 오그라들었습니다. 하지만 육체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정과 나의 의식 속에서 무언가가 오그라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창조행위입니다. 열망하는 마음 안에서 무언가가 오그라들어 더 이상 명상을 계속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육체적으로 멈춘 것이 아니라 단순히 마음속에서의 상상행위를 계속할 마음이 없어진 겁니다.
"그대가 기도를 할 때 이미 받았다고 믿어라, 그러면 그대는 받게 될 것이다."
육체적인 창조행위(성행위)를 마쳤을 때, 넓적다리의 오목한 곳에 붙어 있는 근육은 오그라들어 힘이 쭉 빠지고 더 이상 행위를 하지 못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기도를 성공적으로 끝마쳐 원하던 모습이 이미 되었다고 믿게 되면, 이미 갖고 있다 느끼는 것을 더 이상 구하고자 하는 행위를 할 수는 없습니다. 만족을 느끼는 순간에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무언가가 빠져 나가서 적당한 때가 되면 창조의 증거를 가져오게 됩니다.
* * * *
다음으로 볼 이야기는 창세기 38장입니다. 유다(Judah)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나옵니다. 유다 역시 욧 헤 바(JOD HE VAU)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타마르(Tamar)라는 여인이 나오는데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타마르는 야자수를 뜻하거나 아름답고 용모가 수려한 것을 뜻합니다. 그녀는 우아하고 아름답기에 야자수라고 불립니다. 키가 크고 위풍당당한 야자수는 사막에서도 꽃을 피우고, 그 야자수가 있는 곳에는 항상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만약 사막에서 야자수를 발견한다면, 그 척박한 땅에서 가장 원하던 것, 즉 오아시스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사막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야자수 나무를 보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끔 이 성경의 내용을 표현해보자면, 우리가 찾고자 하는 대상은 야자수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찾아 헤매고 있는 위풍당당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이 이야기에서 아름다운 타마르로 인격화되었습니다.
그녀는 창녀의 면사포를 쓰고 사람들이 드나드는 거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녀의 시아버지인 유다왕은 그 옆을 지나가다가 면사포를 쓴 그녀에게 반해, 그녀와 정을 통한다면 후에 새끼 염소 한 마리를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타마르가 말했습니다. "당신께서 새끼 염소를 제게 주신다는 증표로 무엇을 주실 건가요? 주위를 돌아보면서 그는 말했습니다. "증표로서 무엇을 원하느냐? 타마르는 말했습니다. "당신의 반지와 당신의 팔찌와 당신의 지팡이를 주소서."
그래서 유다왕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반지와 팔찌를 빼서 지팡이와 함께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와 정을 통했고, 후에 유다왕은 그녀가 자신의 며느리 타마르인 걸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아들을 낳아 주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성경의 이야기였습니다. 이제 해석을 해보겠습니다. 진정한 자신의 것 중에서 선물로 줄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아담이 아담 자신으로부터 여인을 창조하는 첫 번째 창조행위에서도 그랬듯이, 자기 자신 외의 다른 선물은 없습니다. 바라던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자신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같은 의미로, 유다에게도 진정한 자신의 것 중에서 다른 이에게 선물할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반지와 팔찌와 지팡이는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들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에서는 유다 자신을 반지와 팔찌와 지팡이로 상징화했습니다.
유다는 먼저 자기 자신이 아닌, 새끼염소를 주는 것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타마르는 그 자신으로 상징되는 것을 주길 원합니다. "저에게 당신의 반지와 당신의 팔찌와 당신의 지팡이를 주세요." 이것들은 왕을 만듭니다. 유다가 그것들을 줄 때, 그는 자기 자신을 준 겁니다.
여러분은 위대한 왕 유다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타마르를 알아서 세상 안에 여러분과 닮은 아이를 낳으려면 여러분은 그녀에게 들어가서 자신을 아낌없이 주어야 합니다. 제가 안정을 원한다고 가정해보세요. 안정을 얻은 사람을 단순히 아는 것으로 그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배후에서 줄을 조종함으로써 그것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제가 안정적인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건강함을 원한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알약이 그 일을 해줄 수는 없습니다. 음식물이나 날씨가 건강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건강하다는 느낌을 사실처럼 받아들여서 건강하게 되었다는 의식을 가져야만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신분이 상승되길 원한다면 왕과 대통령 그리고 귀족들을 단순히 보면서 그들의 후광 속에서 사는 것만으로는 나 자신을 높이지 못합니다. 내 자신이 고귀하고 위엄 있게 된 것을 인식하고 원하는 모습이 된 것처럼 행동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행동할 때, 저는 제 마음을 붙잡고 있는 이미지에 나 자신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녀는 내게 아이를 가져옵니다. 즉, 내가 인식하고 있는 것과 조화된 세상이 건설됩니다.
여러분은 유다왕이고 또한 타마르입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다고 인식할 때 여러분은 타마르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인식하게 되면 여러분의 욕구는 여러분 주변세상 속에서 실제로 나타납니다.
성경에 나타난 어떤 사건이든, 그리고 성경을 쓴 사람들이 이야기를 통해 소개하는 어떤 인물이든 우리가 마음 안에 명심해야 될 것은 한 가지입니다. 그것들 모두 개개인의 마음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사건들입니다. 모든 성경속의 인물들은 모두의 마음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처럼 여러분의 자아를 맞추어 가십시오. 여러분의 의식만이 유일한 실체임을 아십시오. 그런 후에 원하는 모습이 된 느낌을 사실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믿음 그대로 살고 행동하면서, 사실로 받아들인 것에 믿음을 계속 유지하십시오. 항상 이렇게 행동하도록 하십시오.
* * * *
세 번째 살펴볼 부분은 이삭과 그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에 관한 내용입니다. 한 눈먼 사람이 자신의 둘째 아들에게 속아서 첫째 아들에게 주어야 할 은총을 둘째에게 주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는 야곱이 자신을 만져보게 하여 자신을 형으로 속이는 데에 성공하는 내용입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말하기를, 내가 원하노니 내 아들아 내게 가까이 오너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를 만져(feel)보리라 하더라. 야곱이 자기 아비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그를 만지며 말하기를,....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고 야곱이 그의 아비 이삭의 면전에서 떠나자 곧 그의 형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와서.."
이 내용을 지금 다시 재연해보면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해주십시오. 성경의 모든 인물들은 추상적인 생각들이 인격화된 것이므로 그 인격화된 것들을 우리 안에서 대치시켜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장님 아버지이자 두 아들입니다.
이삭은 나이가 많아 눈이 보이지 않는 인물입니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예감하고 그의 첫째 아들인 거친 털이 많은 소년, 에서를 불러 숲에 나가서 사냥한 고기를 가져오라 말합니다. 둘째 아들 야곱은 매끈한 피부를 한 소년이었는데, 이삭과 에서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됩니다. 매끈한 피부의 야곱은 형의 장자 상속권을 갖기를 원했기에 아버지의 염소 떼에서 한 마리를 죽여 가죽을 벗겨냅니다. 그리고는 염소 털이 덮여있는 가죽을 뒤집어 쓴 채, 교묘하게 다가가 아버지를 속여 자신을 에서라고 믿게 만들려고 합니다.
이삭이 말했습니다. "이리 가까이 와서 내가 만질(feel) 수 있도록 하라. 내가 앞을 볼 수 없으니 만질 수 있게 다가오너라." 이 이야기에서 만진다는 것에 주의 깊게 보십시오. 그는 가까이 다가왔고, 아버지는 말합니다. "목소리는 야곱의 것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구나." 에서의 손처럼 거칠거칠 한 것을 느껴보고는 이삭은 야곱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그러자 야곱은 그의 면전에서 떠납니다. 그러자 그의 형,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옵니다.
이것은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 내용 안에서 마음에 관한 해석을 내리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 앉아있는 여러분은 이삭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있는 이 방은 오늘날의 에서입니다. 이 방은 거칠고, 여러분 몸의 감각기관들이 방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감각적으로 인식되는 세상이 바로 성경 속의 에서입니다. 감각들은 여러분이 지금 이 방 안에 있다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모든 것들은 여러분이 여기 있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여러분은 여기 있기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물들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머물고 있는 이 방은 거칠고 감각적으로 인식되는 세상입니다. 다시 말해 에서로 인격화된 여러분의 아들입니다. 반면에 여러분이 현재 원하는 것들, 즉 여러분의 소망은 매끈한 피부의 상태, 즉 찬탈자인 야곱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주변에 펼쳐진 감각기관으로 느껴지는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해서 우리 눈앞에 펼쳐진 세상을 사냥터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게 되면 이 세상을 더욱 더 실체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하지 마시고, 단순히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방 안에 앉아 있다는 감각의 영역에서 의식을 제거하고 여러분이 있고 싶은 곳, 즉 여러분이 실제 세상으로 만들고 싶은 곳에 의식을 놓으십시오.
원하는 것에 집중을 하기 위한 열쇠는 원하는 곳을 이곳으로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즉, 내가 지금 그곳에 있다고 느끼는 겁니다. 다른 곳을 이곳으로, 후에 일어날 일을 현재로 만들어서 현재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로 만들어 그것들을 실제처럼 느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이 방에서 피아노를 원한다고 가정해봅시다. 피아노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피아노가 여기 이곳에 있는 것처럼 마음속에 영상을 만들어서, 상상 속의 손을 피아노에 놓고 단단한 실체인 것을 느끼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은 둘째 아들 야곱으로 상징된 잠재적인 상태를 이삭이 느낄 수 있게 가까이 오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삭은 눈이 먼 사람입니다. 여러분 역시 눈이 멀었습니다. 왜냐하면 원하는 것들의 이미지를 여러분 감각기관을 통해서 볼 수 없으니까요. 여러분은 오로지 마음속에서 그것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지금 여기에 일어나는 일로 생각한다면 단단한 실체인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외부세상 속에 있는 여러분 자신을 잃고 마음안의 세계에 푹 빠져 그것들을 실제처럼 느끼면, 그때 눈을 떠보십시오.
눈을 떴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얼마 전까지 마음의 눈 안에서 닫아버렸던 방은 사냥에서 돌아와 있습니다. 마음속의 상태를 진실이라 믿으면서 축복을 주고 눈을 뜨자, 그때 상상 속에서는 실제가 아닌 것처럼 보였던 외부세상이 돌아와 있습니다. 성경처럼 에서의 입을 통해 속았다고 말해주지는 않지만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방의 존재가 여러분이 속았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다고 느끼면서, 혹은 갖고 싶었던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그 상상 속에 푹 빠져 있는 것은 쉽게 말해 자아를 속이는 겁니다. 이 방을 보십시오.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이 방이 여러분은 속았다고 말해줍니다. 이 법칙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너의 동생이 와서 교묘하게 나를 속였다 할지라도, 너의 장자 상속권을 이미 동생에게 은총으로 베풀었다. 그것을 도로 뺏을 수는 없다."
달리 말하면 마음속에서 실제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믿음을 유지해서 상속권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상속권을 주었고, 그것은 여러분의 외부세상 안에서 드러납니다. 두 가지의 것이 여러분의 방 안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 마음속의 것들이 실체가 되어 여러분의 주변에서 부활하게 됩니다.
원하는 것을 생각해서 이미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십시오. 그 상상이 단단한 실체라는 느낌 속에 푹 빠지십시오. 그 상상의 이미지 속에 실제라는 감각들을 주었다면 여러분은 객관적인 외부 세상에 주어야 할 은총을 주관적인 내면 세상에 준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나 땅 속에 뿌려놓은 씨가 자라는 것처럼, 여러분은 더 이상 그 상상들이 현실 속에서 태어나는 것에 대해 어떤 일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땅 속에 뿌려놓은 씨앗은 그 누구의 도움 없이도 자라납니다. 그 씨앗 속에는 스스로를 펼쳐내는 데에 필요한 권능과 계획들을 모두 가지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삭이 둘째 아들에게 은총을 내려준 이야기를 오늘밤 여러분 안에서 재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시일 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현재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무너집니다. 삶의 모든 환경들은 바뀌고 여러분이 생명을 불어넣었던 것들이 도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원하는 모습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확신에 찬 채 걸어 나간다면,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원하는 것들을 현실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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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 네 번째로 살펴볼 이야기는 모세가 쓴 책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모세가 그것을 쓰지 않았다고 말을 한다면 세심하게 그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신명기의 34장입니다. 누가 이 책을 썼는지에 대해서 성직자들이나 랍비에게 물어본다면 모세가 썼다고 대답할 겁니다.
신명기 34장을 보면 자신의 사망기록을 쓰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모세가 바로 그랬습니다. 한 남자가 앉아서 죽은 후에 묘비에 쓰이기 원하는 것들을 썼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모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스스로 썼습니다. 그리고 그때 모세는 죽음을 맞이하고 완벽하게 자신의 흔적을 지워버려서 후세사람들이 모세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 모세가 주의 말씀대로 모아브 땅에서 죽더라. 주께서 그를 벧프올 맞은편 모아브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하셨으니 오늘까지 그의 묘를 아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모세가 죽을 때에 일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그의 기력도 쇠하지 아니하였다." [신명기 34:5,6,7]
여러분 역시 모세처럼 내일도 아니고 바로 오늘밤 자신의 묘비를 쓰는 방법을 반드시 배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완벽하게 여러분의 존재에 죽음을 맞이해서 세상 누구도 그 낡은 자아가 묻힌 곳을 알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전에는 아픈 모습을 보였다가 지금은 완치되었다면, 여러분이 아프던 모습만을 보았던 사람은 그 병든 존재가 묻혔던 곳이 어디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전에는 여러분이 가난해서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녔었는데 갑자기 부자가 되어 나타났다면, 가난했던 옛 사람은 어디에 묻었습니까? 여러분 마음의 눈 안에서 가난을 아주 완벽하게 지워버렸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그 가난한 자가 묻힌 곳이 어디라고 가리킬 수도,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의식에 완벽한 변형이 일어나서 자신이 부유하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다른 증거들은 깨끗이 지웠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4장의 첫 번째 절에는 인간이 원하는 것을 실현시키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모아브 평원으로부터 느보 산까지 올라가고, 여리고의 맞은편에 있는 피스가의 정상까지 올랐더니, 주께서 그에게 길레드의 온 땅을 단까지 보여주시더라."
여러분은 이 구절을 읽고서는 "그래서?"라고 되물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서색인을 들고 여기 나오는 단어들을 찾아보십시오. 첫 번째 단어인 모세(Moses)는 끌어내는 것, 빼내는 것, 들어 빼내는 것, 꺼내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으로부터 그가 구하고자 하는 것을 끌어내는 힘을 인격화시킨 것이 모세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내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객관적인 실체로서 나타내고 싶은 것들은 여러분의 내부로부터 끌어내야 합니다.
여러분은 모아브 평원으로부터 온 모세입니다. 모아브(Moab)라는 단어는 '멤(Mem)'과 '압(Ab)'이라는 두 개의 히브리 단어를 합친 것으로 '어머니-아버지'를 뜻합니다. 여러분의 의식은 어머니-아버지이고, 이 의식은 세상 모든 것들의 원인입니다. 여러분의 IAMness, 즉 여러분의 인식은 이 모아브, 다시 말해 어머니-아버지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이곳으로부터 어떤 것을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다음 단어는 느보입니다. 성서의 색인사전에서 느보(Nebo)는 예언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예언은 주관적인 겁니다. 만약 제가 "무엇 무엇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들은 마음 안의 이미지입니다. 아직까지 현실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기다렸다가 이 예언들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느보를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바꾸면 소망이나 욕망일 겁니다. 그 소망과 욕망은 올라가기에 힘든 듯 보여서 겉으로 봐서는 그것을 이루어낸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느보는 산이라고 불립니다. 산은 여러분 머리 위에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존재입니다. 여러분 현재의 모습과는 비교되는 여러분이 원하는 것들을 인격화한 것이 느보입니다.
피스가(Pisgah)라는 단어는 마음속으로 응시하는 것을 뜻하고 여리고(Jericho)는 향기로운 냄새를 뜻합니다. 그리고 길레드(Gilead)는 증거의 언덕을 뜻하고 마지막 단어인 단(Dan)은 예언자입니다.
자, 이제 이것들 모두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끔 바꿔보면서 고대인들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보겠습니다. 나의 의식이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나는 이미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느껴서 나 자신을 그 모습과 비슷한 모습으로 변형시킵니다. 나는 이 산을 넘을 수 있는 세상전체란 것을 이제 알고 있습니다. 나의 목표를 명확히 합니다. 그 목표를 더 이상 느보라 부르지 않고 욕구라고 부르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올라서야 하는 나의 거대한 산, 나의 느보입니다. 나는 피스가의 봉우리에 올라서야 하기 때문에 지금 그것들을 마음속에서 응시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만족한 느낌을 얻을 때까지 마음속에서 원하는 것을 응시해야만 합니다. 만약 만족한 느낌을 얻지 못했다면, 향기로운 냄새를 뜻하는 여리고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고 느낄 때, 그 느낌과 함께 오는 기쁨의 감정은 억누를 수 없습니다.
나는 여리고로 상징된 만족한 느낌을 얻을 때까지 내가 원하는 것을 계속 마음속에서 응시해야만 합니다. 만족한 느낌을 얻은 후에는 나의 세상 안에서 그것들을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 어떤 일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남자, 여자, 아이들, 내 주변 세상 모든 것을 뜻하는 길레드의 언덕이 스스로 증거를 가지고 오기 때문입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은 내가 사실로 받아들인 모습으로 스스로 변모될 것이고 내 안에서 간직하고 있는 모습으로 스스로 변모되어 나타날 겁니다. 내가 사실로 받아들인 모습으로 세상이 변화되어 갈 때 예언은 성취된 것입니다.
지금 원하는 것을 인식하고는 이미 내가 성취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여 그 확신 안에서 걸어 나간다면 나는 그렇게 될 겁니다. 그래서 낡은 자아에 대한 관념은 완벽하게 죽음을 맞이해서 사람들이 그 낡은 자아가 묻힌 곳이 어디냐고 묻더라도 어느 곳도 가리킬 수도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난 완벽한 죽음을 맞이하였기에 후손들 역시 내 옛 자아가 묻힌 곳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지금 여기 계신 분들 중에도 세상에 드러난 자신의 모습을 완벽하게 변형시켜 친한 친구들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될 사람이 있을 겁니다. 저는 예전에 댄서였습니다. 십년 동안 브로드웨이, 보드빌, 나이트클럽 등에서 춤을 췄습니다. 그때 당시 저는 제 친구들과 떨어져 지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고, 항상 공연이 끝난 후에는 친구들과 만찬을 즐기곤 했습니다. 그 친구들이 없다면 살 수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과 함께 지낼 수 없다고 고백해야겠습니다. 이제는 서로에게 공통된 것이 없습니다. 서로 길에서 마주친다고 해도 일부러 반대편으로 걸으려 하고, 만나더라도 서로 이야기할 것이 없기 때문에 냉랭한 만남이 됩니다. 제 예전의 삶은 죽음을 맞이하였기에 제가 옛 친구들을 만난다 하더라도 옛날이야기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여전히 과거의 상태에 묶여 살면서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들은 예전의 자신을 조금도 묻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예전의 낡은 모습에 더 커다란 생명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내 모습이 내가 원하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합니다. 그러나 나를 변화시키는 법칙을 알고 있기에, 난 내가 이미 원하는 모습이 된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이루어졌다는 확신 속에서 걸어 나갑니다. 새로운 존재 안에서 낡은 자아는 죽고 예전의 자아관념과 관계된 것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낡은 자아의 어떤 부분도 새로운 자아 안으로 가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새 포도주를 오래된 자루에 담을 수 없고 새 헝겊을 헌 옷에 붙일 수도 없습니다. 완전하게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미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나를 묻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역시 필요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가 죽은 자를 묻게 하십시오. 뒤를 돌아보는 일조차 없어야 합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에게 하늘나라의 왕국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해 자신에게 묻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이성이란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더라도 그런 것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주변의 상황들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 역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과거의 자신을 여러분이 묻을 필요는 없습니다.
"죽은 자가 죽은 자를 묻게 하라."
새로운 자아의 모습에 믿음을 유지해서 과거의 자아를 묻는다면, 훗날 그 누구도 낡은 자아가 묻힌 곳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기에 오늘날까지 이스라엘의 어떤 사람도 모세의 묘비를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