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게임

"결과에서 살기"에 수록된 강의. "빵을 물에 던져라!"

Chapter 1: 인생 게임

CHAPTER 4 Game of Life
인생 게임


인생이라는 게임은 다른 모든 게임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규칙에 따라 진행되며, 그 규칙을 어기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아침부터 밤까지 이 인생의 게임을 하고 있으니, 이기기 위해서는 그 규칙을 배워야 합니다.
전도서에서 말하는 규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생각으로도 왕을 저주하지 말고, 침실에서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새가 네 말을 옮기고, 날개 달린 것들이 그 소식을 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마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미 그것을 받았다고 믿어라. 그러면 너는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이미 그것을 가졌다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 규칙이라면, 게임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이미 목표를 이룬 상태에 있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느낌을 유지해야만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규칙은 “네 빵을 물 위에 던져라. 그러면 여러 날 후에 그것을 찾을 것이다”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이는 결과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고 행동하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선행을 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목수였습니다. 목수는 씨앗에서 꽃, 나무, 대지와 같은 것을 생산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구약의 예언은 예수라는 목수가 탄생시키는 씨앗입니다. 그는 율법과 예언자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완성하러 왔습니다.
“너의 빵을 물 위에 던져라”라는 말에서 빵은 먹어치우다, 소비하다는 의미입니다. 물은 은유적으로 정액을 의미하며, 그것은 인간의 정자를 나르는 생명의 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창조 행위는 육체적인 것이 아닌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동일합니다.
당신은 열정적으로 당신의 빵을 물 위에 던져야 합니다! 당신은 소망을 이루기 위한 열망에 사로잡히고, 그 소망을 사랑하며 불타오르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강렬한 상상은 언제나 그것과 비슷한 현실을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세상을 떠날 때 성공한 인물로 기억되었지만, 사는 동안 많은 실패를 겪었던 인물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생을 바꿀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운명이 기분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분이 운명을 결정한다.”
다시 말하자면,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의 생각과 감정을 외부 세계에 나타나는 모습과 비교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반면, 이 법칙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게임에서 패배합니다.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의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기분을 바꾸기만 한다면 상황도 변할 것입니다. 그제야 그들은 세상 배후에 있는 법칙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루 종일 우울함에 빠져 살며 평생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뉴욕에 살 때가 기억납니다. 그때 저는 특정한 사람들이 제 쪽으로 다가오면 길을 건너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우울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몇 시간씩 아내나 남편, 자녀와 손주들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 모든 이야기는 하나같이 우울한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분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세상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기에, 자신들의 내면 세계와 외부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법칙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법칙을 사용한다면 당신은 미래를 예언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기분이 당신 안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지속한다면 곧 그 기분에 맞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무생물도 이러한 내면 세계의 영향을 받습니다. 저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 때, 몇 년 동안 손대지 않았던 책을 서재에서 꺼내곤 합니다. 그리고 무심코 펼친 책에서, 제 기분을 확인해주는 내용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테이블은 변함이 없지만, 당신의 일시적인 기분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당신의 기분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당신의 기분이지, 운명이 당신의 기분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풍요로움을 느끼면 풍요를 끌어당긴다는 것을 모른 채, 가난만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잠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영혼은 주님의 등불이다.” 주님의 등불은 세상의 빛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 빛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 램프 속 요정 지니라는 “자연(nature)”은 우리의 노예로서 우리의 기분에 따라 세상을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자연’이란 모든 인류를 포함한 동물, 식물, 광물계를 의미합니다. 사실, 외부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이 등불의 지배를 받습니다. 내면에서 형성된 이 노예는 당신의 생각을 반영하여 세상을 창조합니다. 그 어떤 것도 그 창조를 막지 못합니다.
마음을 관찰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인식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기분과 주변 환경 사이의 법칙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때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예언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기분과 일치하는 사건들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 있는 존재이든 책 같은 무생물이든, 모든 것은 반드시 당신의 기분을 반영해서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제 인생이라는 게임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원하는 것을 알았다면, 이미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감정을 느껴야 합니다. 이성과 감각이 그것의 존재를 부정할지라도, 계속 고집한다면 그 가정이 굳어져 사실이 되고, 당신의 세상에 모습을 나타낼 것입니다.
이것이 게임하는 법입니다. 작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시도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이 사상을 어리석다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단언하건대, 당신의 기분이 당신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저를 믿으세요. 저는 이 원칙을 제 삶에서 수없이 증명했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자신의 말을 실제로 실천함으로써 서구 세계에 용기와 의지를 불어넣었습니다. 런던의 폭격과 공포 속에서도 처칠은 승리의 기분을 유지했고, 가장 암울한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분이 결국 전 세계에 현실로 모습을 드러나게 될 것임을 알면서 그 기분을 유지했습니다. 반면 적들은 이 법칙을 알지 못한 채 군대와 전쟁 무기에만 의지했습니다.
뉴욕 타임즈에 기록된 처칠의 멋진 발언은 제 삶에서도 진실로 증명되었습니다. 저는 그저 기분을 바꿈으로써 제 삶의 환경을 변화시켰습니다. 이제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지금 당신의 소망이 이루어진다면 어떤 기분이 들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말합니다. 소망이 이루어진 생각을 가볍게 떠올려 보십시오. 잠시 그 생각과 함께하면, 그때의 기분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입니다. 그 기분을 유지하며,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각들과 놀아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세상이 새로운 기분에 맞춰 변하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여성분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60대 중반인 그녀는 이 법칙을 적용하기 시작했을 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아침, 주당 75달러를 받는 직장으로 출근하기 전에 욕조에 몸을 담그며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나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어!” 그녀는 그 기분을 유지하며,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계속 간직했습니다. 그 주에 그녀는 첫 돌파구를 맞이했습니다.
그녀는 30년 넘게 가까운 친구와 함께 오페라, 콘서트, 브로드웨이 쇼를 관람해왔습니다. 매일 밤 그들은 멋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지만, 그 친구는 그녀에게, 절대 돈을 주지 않을 거라고 여러 번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갑작스럽게 마음을 바꾸어, 그녀가 원하는 대로 즉시 사용할 수 있는 10만 달러의 신탁 기금을 그녀에게 양도했습니다. 얼마 후, 그녀는 이 법칙을 더욱 적극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했고, 그는 또다시 10만 달러의 신탁 기금을 그녀를 위해 마련해주었습니다. 지금 이 여성은 월세 165달러를 내며, 20만 달러 신탁 기금과 사회보장 혜택에서 나오는 수입을 다 쓰지도 못할 정도로 풍요롭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나이가 지긋한 그 신사분은 약간의 뇌경색 증상을 겪고 있었고, 두 사람은 결국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만나려 하지 않았고, 그녀는 화가 나서 그를 저주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생각으로도 왕을 저주하지 말고, 침실에서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왜냐하면 새가 네 목소리를 옮기고, 날개 달린 것들이 그 일을 알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여성분은 매주 저에게 전화해 자신이 이제는 저주를 극복해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계속 저주를 한다면 부정적인 것이 그녀의 세상에 들어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법칙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법칙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판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선택은 온전히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만약 부정적인 생각에 익숙하다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라는 생각을 지속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 동안은 그런 생각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즉각적으로 현실로 나타나지 않으면 곧 포기하거나 부정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게임을 잘하기 위해서는 규칙을 알고 그 규칙을 적용해야 합니다. 기억하세요. 모든 게임에는 규칙이 있으며, 그 규칙을 어기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자신을 속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조롱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심은 대로 반드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심판의 눈을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당신 내면의 관찰자의 눈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 관찰자는 바로 당신 자신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아는 것처럼, 그분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인식과 당신 세상의 창조자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을 조롱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한 잘못된 일들을 기록하고, 당신의 감정에 맞춰 당신의 세상을 만들 것입니다. 지금부터 친구가 보내준 편지 한 통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지난 월요일 밤, 한 친구가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 그의 소원이 이루어졌다면 그가 할 법한 말을 상상하며 30분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기 직전 친구의 아내가 제 꿈에 나타나 제게 도움을 준 것에 대해 고마워했습니다. 화요일 저녁, 거실에서 음악을 즐기고 있을 때 친구가 상상 속에서 떠올랐습니다. 그는 확신에 차고 기쁨이 가득한 목소리로, 제가 상상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하며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이루어졌다는 짜릿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 일이 곧 현실에서도 확인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제 친구가 상상 속에서 들었던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직접 그 남자로부터 듣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편지에는 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꿈에서 저는 호텔 로비로 들어가 데스크에서 체크인한 뒤, 다음 날 아침 7시에 전화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남자 직원이 제 이름 옆에 숫자 7을 굵게 적는 것을 보고 저는 깨어났습니다.”
이것은 매우 경이로운 비전입니다. 7은 영적 완벽함을 상징하는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숫자는 임신과 부화에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곤충과 동물 세계에서는 임신 기간이 280일인데, 이는 7의 배수입니다. 닭의 알도 제대로 부화되려면 21일이 걸립니다. 이 역시 7의 배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탄생이 7의 배수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는데, 이 꿈에서의 7은 영적 완전함의 부화를 상징합니다.
또 다른 여성분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저는 침대에 누워 창백하게 죽은 듯한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제 몸에서 거대한 남자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훌륭한 예술가이자 신비가였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그의 이름은 조지 러셀로, 많은 사람들에게 A.E.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비전을 말해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서 일어났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그곳은 거대한 홀로, 새벽과 저녁의 빛깔이 어우러져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오팔 기둥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둥들 사이에는 불의 관을 쓴 왕들이 앉아 있는 왕좌들이 있었다. 한 왕은 용의 문장을, 다른 왕은 불의 깃털을 쓰고 있었다. 중앙에는 깊은 혼수 상태에 빠진 듯한 어두운 몸이 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다.
“홀의 가장 끝, 다른 왕좌보다 높은 왕좌에는 태양의 찬란한 빛이 뒤에서 비추고 있는 존재가 앉아 있었다.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 명의 왕이 왕관을 쓰고 일어나 바닥에 있는 몸 위로 손을 뻗자, 그들로부터 빛의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갑자기, 불의 왕관을 쓴 이 왕들만큼이나 크고 위엄 있는 형상이 그 어둠의 몸에서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자신의 형제들을 알아보고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들도 왕좌에서 내려와 손을 들어 똑같이 인사를 했고, 형제처럼 함께 태양 속으로 걸으며 사라졌다.”
이 모든 비전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전조입니다. A.E.는 그를 외부에서 온 존재로 보았지만, 이 여인은 그가 자신의 내면에서 나온 존재로 보았습니다. 두 경우 모두,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경이로운 사건의 전조입니다. 왜냐하면 그 왕관을 쓴 왕, 즉 하느님의 아들은 우리 모두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몸이 여성의 것이든 남성의 것이든, 피부색이 어떠하든 관계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그분의 영광을 비추며 그분의 모습을 나타내는 하느님의 아들이 있으며, 그는 주님의 위대한 등불입니다. 언젠가 이 장엄한 존재가 당신의 죽음의 옷으로부터 일어날 것이며, 당신은 생명의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인생 게임의 규칙을 배우고 그 게임을 해야 합니다. 삶, 그것은 마음 상태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며, 이렇게 모인 마음 상태가 현실에서 창조됩니다.
제 친구는 친구의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들을 법한 말을 마음속에서 상상하며 들었습니다. 친구 안에서 일어난 마음 상태가 모여 인생 게임 속에서 펼쳐질 사건을 창조했습니다. 당신의 마음 상태를 배열해서 그것이 내면에서 일어나게 했다면, 그 행위를 반복할 필요는 없습니다. 안도감을 느낀 순간, 당신은 물 위에 빵을 던진 것입니다.
물론 당신이 겪은 것이 육체적 성적 행위는 아니지만, 안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즐거움 중 안도감은 가장 강렬하게 체감되는 감정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귀가가 늦어졌을 때, 당신은 문을 여는 열쇠 소리를 초조하게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그 소리를 듣게 되면 강렬한 안도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 올바르게 상상했을 때 느끼게 될 안도감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매일 그 상상을 다시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면, 아직까지 물 위에 빵을 던진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여러 번에 걸쳐 상상할 수 있지만, 잉태는 단 한 순간입니다. 안도감을 느끼는 순간, 빵은 물 위에 던져졌고,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올 것입니다.
저는 상상을 한 후 몇 분 만에 전화가 울려, 상상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음을 확인했던 적이 있습니다. 때로는 며칠, 몇 주, 혹은 몇 달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상상을 하고 안도감을 느낀 후에는 다시 그 상상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의식적으로 인생 게임을 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지금도 당신은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게임을 계속 하고 있는 중입니다. 정부 보조금으로 생활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정부가 자신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부라는 것은 없고, 단지 세금을 내는 우리만 있을 뿐입니다. 정부는 돈이 없으며, 단지 우리 주머니에서 가져간 것을 줄 수 있을 뿐입니다. 보조금을 받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받지 못한다고 불평합니다. 그리고 그 불만은 하루 종일 지속되며 그들의 기분을 지배합니다. 그들의 기분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변화도 없고 자신들이 유지하는 기분과 불만스러워하는 외부 세계 사이의 법칙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그들의 기분이 삶의 모든 현상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그들은 이를 부정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지금 삶의 환경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는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원인은 없습니다. 하느님이 유일한 원인이며, 그분은 인간의 경이로운 상상력, 그 자체입니다. 제가 말하는 상상은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을 의미합니다.
상상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상상하는 것과 접촉하는 것입니다. 상상의 본질은 접촉입니다. 당신이 상상할 때, 특정 감정과 접촉하게 되며, 당신이 접촉한 그 감정이 곧 당신이 창조하는 현실이 됩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만들고 세상 안의 만물을 창조했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하느님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육신을 두르고 있는 동안에는 그 힘이 낮게 조율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인생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이 규칙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모두 있으니, 누구도 저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도서에서 “왕”과 “부자”라는 단어가 언급된 이유는 가장 많이 질투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백만장자가 아니더라도, 단지 남보다 약간 더 나은 상황에 있으면 충분히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더 좋은 동네에 살거나, 더 비싼 월세를 내거나, 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가거나, 더 좋은 옷을 입는 것만으로도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왕이나 부자를 생각으로도 저주하지 말라는 경고가 주어집니다. 모든 생각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신성한 법칙에 따라 서로의 존재 안에서 섞이기 때문입니다.
외부 세상의 모든 이들이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의식은 각각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내면에서 변화를 이루었다면, 자신의 세상을 바꾸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변화를 통해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면, 그 사람의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변화는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상상한 변화를 만들기 위해, 특정인을 지목해서 특정한 역할을 맡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필요하다면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할 일은 그저 당신의 내면에서 결말에 서 있는 것뿐입니다.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 바베이도스에 갔을 때, 7개월 동안 그 섬을 떠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바로 다음 배로 떠나고 싶었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배에 타는 것이 제가 원하는 결말입니다. 그래서 부모님 댁의 의자에 앉아, 상상 속에서 배에 올라타 섬을 떠나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떻게 그 배에 탈지는 몰랐지만, 일주일 후 배가 섬을 떠날 때 저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경험한 사실입니다.
어디로든 가고자 할 때, 먼저 상상 속에서 그곳에 가야 합니다. 그러면 당신의 요청을 거절할 사람들조차도 때가 되면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저는 이 방법을 사용해서 군에서 제대를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명예 제대를 하여 뉴욕에 있는 제 아파트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이미 그 일이 일어난 것처럼 잠을 잤습니다. 그러자 제대를 반대했던 상관이 마음을 바꾸었고, 제가 제대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간단하면서도, 그 과정 자체가 꽤 즐거운 게임입니다.
당신은 어떤 물건을 갖고 싶으신가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그것을 떠올리고 감각적 생생함이 생길 때까지 느껴 보세요. 단순히 어떤 램프가 아닌 특정한 램프로, 그냥 테이블이 아닌 특정한 테이블로 생각하세요. 의자가 느껴질 때까지 그 의자에 앉는 것을 느껴보세요. 그 의자에 앉아 방을 바라보세요. 그 순간, 당신은 그곳에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상상 그 자체이며, 상상 속에 있는 곳이 바로 당신이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곳에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것을 통해, 물 위에 당신의 빵을 던지세요. 당신의 노예인 지니가 사건의 다리를 만들어줄 것이며, 당신은 그 다리를 건너 그 의자에 앉고, 그 램프를 잡고, 그 테이블을 만지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에는 눈이 멀었지만 촉각은 느낄 수 있었던 이삭이 아들 야곱을 불러 이렇게 말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너를 만져볼 수 있게 가까이 오너라. 네 목소리는 내 아들 야곱 같지만, 너의 피부는 에서처럼 느껴지는구나.” 상상과 주관적 상태를 나타내는 야곱은 그 당시 객관적 세계라는 에서의 특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세상에 태어날 권리를 상상 속 상태에 부여했습니다.
이삭처럼 당신도 조용히 앉아 상상의 손을 사용해 테니스공, 야구공, 축구공, 골프공의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즉 주관적일 뿐이고 당신에게 전혀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라면 그 차이를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실체’라고 여겨지는 것들 사이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것들은 아직 당신의 감각에 객관화되지 않았더라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그것들에게 현실성을 부여하는 순간, 그것들은 당신의 세계에서 실제가 될 것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도해 보세요. 하나의 물건을 떠올리고, 당신 내면의 존재에게 그 선물에 감사의 마음을 전해 보세요. 그리고 외부의 존재에게도 감사하세요. 내면과 외부는 서로 연결된 한 쌍이며,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면에서 냄새, 모습, 감정을 관찰하며 당신이 바로 생명 그 자체임을 깨달으세요.
그렇습니다. 인생은 하나의 게임입니다. 바울은 “나는 경주를 끝마쳤고, 선한 싸움을 싸웠으며, 믿음을 지켰다”는 말을 통해 인생을 경주에 비유했습니다. 저는 게임이라 부릅니다. 둘 모두 경쟁 요소를 담고 있지만, 그 적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타인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려고 하지 마세요. 당신이 쓴 것과 같은 법칙을 그도 사용해서 그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 하세요. 설사 그것이 당신의 목표와 비슷할지라도 말입니다. 당신이 나누는 지식은 결코 당신의 것을 빼앗지 않습니다. 그냥 당신이 원하는 것을 결정하세요. 그리고 그것을 이뤘다는 것을 느껴서 물 위에 당신의 빵을 던지세요.
그리고 그 생각을 내려놓고, 인생이라는 게임이 당신의 세계에서 완성되도록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두세요.

자, 이제 침묵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