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 YOU CAN FORGIVE SIN

*14장은 번역자가 다르므로, 일부 용어나 표기가 기존 장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풍환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중풍환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곧 요를 걷어가지고 나갔다. 이것을 보고 무리는 두려워하는 한편
“사람”에게 이런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성서의 말을 변형해서 “당신이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이를 불경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상황들(병, 여러 가지 삶의 고민들)의 원인을 현재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세상 탓으로 돌리곤 합니다.
우리에게 생기는 병과 삶의 여러 고민들은 사실 우리의 죄에서 비롯되었음에도, 우리는 이게 부족해서, 저게 없어서라고 말하며 외부적인 것에 핑계를 대곤 합니다. 또한 그런 핑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줄 예수가 우리 가운데 왔고, 오직 예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죄란 과연 무엇인가요?
죄란 삶에서 “과녁을 빗나가는 것”, “길을 잃어버리는 것”, “목적을 놓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삶에 목표라는 과녁조차 없다면 우리는 죄를 짓고 싶어도 짓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어떤 목표를 갖고 있는데 그것을 실현하지 못해 그 목표한 것을 놓친다면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목표를 놓치고도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이유는, 과거의 어떤 죄도 비난하지 않으며,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신의 죄를 말해보십시오. 당신의 목표를 말해보십시오.
당신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가 이 세상에 온 유일한 이유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그의 목적을 놓치지 않고 그 안에서 온전하게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서다.
마르코 복음과 마테오 복음에서 말하는 중풍환자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셨다. 그때 어떤 중풍환자를 네 사람이 들고 왔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안심하여라. 너의 죄가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 사람이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가?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중얼거렸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알아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중풍환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는 것과 ‘일어나 네 요를 걷고 걸어 가거라’ 하는 것 중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그리고 중풍환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고 집으로 가거라.”
중풍환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곧 요를 걷고 나갔다. 이것을 보고 무리는 두려워하는 한편 “사람”에게 이런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마르코 복음 2:1-12
여기서 말하는 그 “사람”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 권한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죄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이제 우리는 “죄”라는 것이 과녁을 빗나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예수는 진리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진리이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는 성서의 모든 곳에서 이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는 자기 자신을 “진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무엇이 되고 싶습니까?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심지어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그것에 이름을 붙여보세요.
“나는 무엇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그 존재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그 “되고 싶은 존재”입니다. 이 말을 듣고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그 존재라고요? 말도 안 돼!”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순간, 여러분은 진리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말했습니다.
나는 (I AM) 진리이다.
“I AM”은 이 세상의 모든 것입니다. “I AM”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이 원하는 모습을 상상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되고 싶다고 상상한 모습에 대해 믿음도 확신도 없다면 여러분은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이 되고 싶습니까? 만일 내가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믿음을 유지한다면 이 세상 어떤 것도 내가 그 일을 이루어내는 것을 멈추게 하지 못합니다.
어떻게요? 저에게 묻지 마십시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가 방법을 알고 모르고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나의 목적에 대해 믿음을 유지한다면 나의 목적을 이루어주기 위해 모든 우주가 헌신합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이 원하는 모습의 사람이 이미 되었다면,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제가 오늘 밤 여러분에게, 여기 이 방안에 부자인 사람이 있냐고 물었을 때, 부자가 여러분의 목표가 아니라면, “나는 부자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여러분의 목표인데도 현재의 가난한 상태만 보고 “나는 부자입니다”라고 말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목적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이 자리에 있는데 지금 현재 그런 모습이 아니라고 해서 “저는 유명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지 못한다면 이것 역시 목적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그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그임을 믿지 않으면”은 우리가 걸치고 있는 이 육체가 아닌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I AM”이 내가 되고자 하는 그 존재임을 믿지 못한다면 나는 나의 목적을 놓치고 있는 것이고, 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삼은 목적은 외부의 영향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나의 건강상 문제는 외부적인 상황과 환경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지금 내가 목적을 놓치고 있다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과녁을 명중시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느님 한 분입니다.
이사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의 구원자이다. 내가, 바로 내가 주님이다.
나 이전에 신이 만들어진 일도 없고,
나 이후에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으리라.
나 말고는 구원해주는 이가 없다.
하느님만이 나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즉, 당신을 용서할 수 있는 존재도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당신의 의식, 즉 “I AM”입니다. 당신이 당신 스스로를 구원합니다. 지금 당신이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습니까? 그 감정과 상태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하며, 이미 그 상태에 있는 것처럼 믿음으로 걸어가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세상 어떤 것도 당신을 멈출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어떤 것도요! 하느님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누구입니까?
“나는(I AM)” 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하느님입니다. 혹시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기준으로, 대통령이나 여왕, 대기업 회장과 같은 지위를 가진 이들이 당신보다 더 위대하다고 느끼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과녁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안다면 그 어떤 사람도 당신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 어떤 것에도 지배당하지 않는 존재이며, 그 어떤 것도 당신보다 크지 않습니다.
이제 다시 중풍환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제가 이 중풍환자의 의미에 대해 설명한다면 아마 놀랄 것입니다. 중풍환자는 네 사람에 의해 실려 왔다고 성경에 적혀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네 사람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우리는 보통 감각을 오감으로 나누지만, 고대 학자들은 네 가지 감각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들은 접촉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감각인 미각과 촉각을 하나로 간주했습니다. 맛보는 것과 만지는 것은 먼저 접촉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미각과 촉각을 하나의 감각으로 간주하고 이외 시각, 청각, 후각을 구분하였습니다. 이 네 가지 감각(미각과 촉각, 시각, 청각, 후각)을 성서에서는 네 명의 사람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외부적인 네 가지 감각에 의해 오늘 이곳에 실려 왔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내 은행 계좌의 잔고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2주 후 미국 정부는 내 계좌에서 세금을 가져갈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미국 정부가 어떤 존재인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만, 2주 후 일정 금액의 세금을 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나는 그 세금을 위해 돈을 준비해야 합니다. 나는 네 가지 감각을 통해 내 은행 잔고를 인식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세계 안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 네 사람의 어깨에 실려 이곳에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는 제게 말합니다.
너의 죄는 용서받았다. 그러니 네 스스로 걸어 나가라.
하느님 외에 누가 나의 죄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이름은 “I AM”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만일 내가 어떻게 해야 2주 후 세금을 낼 수 있을까 생각한다면 나는 나 스스로 걸어 나갈 수 없습니다. 대신 나는 죄를 용서 받았기 때문에 내가 내야만 하는 세금이 이미 모두 지불된 것을 나의 세상에서 봅니다. 나는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 스스로 걸어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일자리가 없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나는 세금을 내야하고 음식을 살 돈마저 없어 그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나는 여기 네 명의 남자에 의해 중풍환자인 채로 실려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에게 나의 죄는 용서받았으니 침상을 걷어, 일어나 걸으라고 합니다. 중풍환자의 모습으로 여기 네 남자의 등에 실려 온 나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외부적인 감각들, 그 네 가지 감각들이 주는 것들을 무시하면, 나 스스로 일어나 걸을 수 있습니다. 나를 중풍환자로, 내가 실업자라고 느끼게 해주는 그 외부적인 증거들을 무시하고 걸어 나갑니다. 나는 외부 감각이 전해주는 상황들을 무시한 채, 내가 원하는 모습이 이미 실현되었다는 믿음으로 걸어 나갑니다.
절대 외부적인 네 가지 감각들이 전해주는 것들에 휘둘리지 말고,
일어나 걸어가세요!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이 나의 모습을 이루어주기 위해 움직이고 있음을 믿으세요.
나는 이곳에 중풍환자로 왔지만 지금은 나 스스로 다시 걸어 나갑니다. 이것이 이 이야기가 주는 핵심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스스로 일어나 걸어 나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당신의 죄를 용서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이전에 무엇을 했든 상관없이, 예수는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습니다. 뒤를 돌아보지 마세요. 당신이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고 믿고, 그것만 보고 걸어 나가세요. 그러면 당신의 죄는 용서받을 것입니다.
누가 용서합니까? 하느님이 용서합니다. 하느님이 당신을 용서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누가 확신합니까? “내가(I AM)” 확신합니다. 내가 그 하느님입니다.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원하는 모습이 되어있다고 확신합니다. 나는 그것을 하느님이라 부르고 그 상태에서 걸어갑니다.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했든, 과거는 잊어버리세요. 단지 당신이 원하는 모습을 꿈꾸고 그것을 확실하게 믿으세요.
이제 블레이크가 한 말을 보겠습니다.
예수라는 영혼은 우리의 죄를 끊임없이 용서하고 있다.
우리의 죄는 매 순간 용서받고 있습니다. 오늘 밤 우리가 집으로 돌아와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친구를, 주변 사람들을 용서했다는 이야기를, 다시 말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목적을 찾고 그 안에 온전하게 머물게 되었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고, 저는 연단에서 그걸 듣기를 바랍니다. 만일 제가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오늘 밤 이 곳을 걸어 나간다면 저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것도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도 저는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제가 확신하는 한, 그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있다는 것을 믿으니까요.
씨앗이 뿌려지고 약속한 시간이 지나면 꽃은 피어나게 됩니다. 꽃이 피기까지의 시간이 길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꽃은 더 늦게도, 더 빠르게도 아닌 정확히 제 시간에 피어납니다. 이것은 결코 어긋나지 않는 법칙입니다.
성서에서 “죄”를 또 다르게 표현한 말은 “trespass(길에서 벗어남)”입니다. 주의 기도에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trespass)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trespass)를 용서하시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죄 지은 자”는 “Trespass”이며, 자신의 가고자 하는 길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당신과 제가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는 실업자입니다. 우리는 그가 실업자라는 상태를 알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물론 상황은 나쁩니다. 그는 어쩌면 지금 일을 구하기에 어려운 상태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그가 실업자라는 외부적인 현실이 아니라, 우리가 그를 실업자인 상태를 전제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네 가지 감각에 의해 이야기 하는 것, 이것이 지금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가 가질 수 있는 수많은 상태 중 현재 단지 실업자라는 한 상태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의 상태가 전부인 듯 해석하는 이 보잘것없는 덫에 매일, 매순간 걸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매순간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문을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거나 특별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이유로 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접합니다. 그리고 평론가들이 그에 대해 쓴 글을 읽고는, 그것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 그 사람을 그 기준에 맞춰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이 구절을 다시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읽고, 듣고, 본 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실업자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직업과 그에 따른 얼마의 보수를 원합니다. 나의 세상에서 나는 그가 스스로 원하는 직업을 얻고, 원하는 금액을 받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나는 그가 그런 상태가 된 것에 대해 기쁨을 느낍니다. 그렇게 하면 그는 현실에서도 원하는 직업을 얻고 수입도 얻게 됩니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이것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주의 기도의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이 부분을 그저 문맥 그대로 하느님께 자비를 보여 달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다시 잘 읽어보세요. 중풍환자는 네 명의 등에 실려서 이곳에 왔습니다. 중풍환자를 데리고 온 네 명의 남자는 예수가 중풍환자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를 예수 앞에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는 그 중풍환자를 데리고 온 네 남자와 중풍환자에게 “너희의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대리믿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일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해도 제가 여러분 대신 여러분을 위해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제게 어떤 믿음이 없다고 할 때 여러분이 저를 대신해 제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믿음을 대신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대리믿음”은 종종 본인 스스로 믿는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만약 제가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믿음도 부족하고 실패를 예상하고 있더라도, 당신이 저를 대신해 제가 소망이 이루어진 것을 상상한다면 그 일은 이루어집니다. 중풍환자를 예수 앞에 데리고 온 네 명의 남자는 그 행동으로서 그들의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았고, 그래서 그 중풍환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아들아. 너의 죄는 용서받았다.
이러한 해석을 불경스럽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감히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시면서요. 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이것을 꼭 해보세요. 여러분의 이웃이 간절히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다고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고 상상해보세요. 그 소식을 듣고 여러분도 함께 기뻐하며 축하하는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보는 것입니다.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처럼 느껴진다면, 세상은 반드시 그 소망을 실현시켜 줄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죄를 용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에게 그런 권한이 있다고 하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기억하세요.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고,
땅에서도 푼다면 하늘에서도 풀려있다.
나는 누군가를 보고 그를 나의 네 가지 감각에 의해 판단해 버립니다. 이것이 내가 땅에서 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원하는 모습이 되어있는 것을 보고, 그가 스스로 걸어 나가는 것을 봅니다. 나는 내 감각들이 전해주는 것들을 버립니다. 나는 그런 감각들이 전해주는 것은 버린 채 그가 직업을 구했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그에 대한 나의 이런 믿음을 유지할 때 그것은 이 세상에서 진실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우리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에게 어떤 목적조차도 없다면 당신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죄라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도덕적인 규범을 어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목적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럼 그것을 느껴보세요. 그것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몸과 마음 깊은 곳에서 느껴보세요.
로마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육체가 아닌 영으로 걸어라.
육체는 나의 감각입니다. 나의 감각은 내가 되고자 하는 모습이 되어있다는 것을 거부합니다. 당연하죠. 지금 눈을 떠서 주변을 본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여러분은 이런 육체에 의존해 걷지 마세요. 우리는 영적인 감각으로 걸어 나가야 합니다. 나의 영혼은 나의 상상 속에서 내가 원하는 것이 되어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이 강연이 끝나고 집에 돌아갔을 때 이런 결핍을 나타내는 상황과 맞닥뜨리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믿음을 유지하세요. 내가 상상하는 것을 믿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믿는다면 그것은 사실이 되어 나타납니다.
내 모든 감각들이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을지 모른다고 나에게 말해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것을 무시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외부적인 상황을 전해주는 네 가지 감각으로 걷는 사람이 아닌 영적으로 걷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꼭 이것을 해보기를 바랍니다. 여기엔 어떤 실패도 없습니다. 당신의 목표를 인식하고 이것을 꼭 해보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 저는 3개월 전쯤 청중석에 앉아있던 한 남자로부터 멋진 내용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직장에서 인정받고, 열심히 일하는 그는 올해 그 성과에 걸맞은 많은 보너스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고자 했던 보너스는 사장의 애인에게 돌아갔습니다. 저는 그와 함께 그가 더 높은 연봉의 직업을 구한 것을 상상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가 보낸 편지에는, 더 많은 돈을 받고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직장을 구했다는 소식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가 그 편지를 쓰고 있던 바로 그 순간, 다른 곳에 있던 저는 이미 그가 보너스를 많이 받는 좋은 직장을 갖게 되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제게 그렇게 말해줄 것이라 확신했고, 그 상상을 하는 동안 단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당신이 원하는 것이 어떤 상태이든, 그 상태에서 온전하게 머무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 속에 하느님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말을 할 때 “나는(I AM)”이라는 말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입니다.
“나는” 아인슈타인입니다.
“나는” 네빌입니다. “나는” 하느님입니다.
네빌이라는 것은 하느님이라는 존재의 작은 일부입니다. “나는 부자입니다”라고 할 때도 하느님의 일부입니다. 하느님은 무한하고, 하느님은 모든 것입니다. 말을 하려면 우리는 항상 “I AM”이라고 해야 하며, 그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는 감각이 전하는 중풍환자를 마음속으로 불러오게 됩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 마음에 있는 중풍환자가 전부라고 여기지 마세요. 네 가지 감각으로 외부에서 전해지는 감각들을 무시하고 중풍환자가 스스로 걸어 나가는 것을 보세요.
당신이 하느님의 이름을 말할 때는 단지 “하느님”이라고 할 때만은 아닙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항상 기도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나는(I AM = GOD) 건강하다, 나는(I AM = GOD) 부자다, 나는(I AM = GOD) 안전하다”처럼 말이죠.
만일 당신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그것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당신이 이전에 보지 못한 세상이 펼쳐질 것입니다. 이 법칙은 이 세상에서 국적이나 피부색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말을 할 때 “나는 (I AM)”이라고 말해야만 합니다. “나는 이것입니다.” “나는 남자입니다.” “나는 미국인입니다.” “나는 중국인입니다.”
당신은 무엇이 되고 싶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말해보세요.
“I AM”이 그것을 이루어줄 것입니다. 하느님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내가 하느님이라는 생각이 당신의 모든 꿈을 이 세상에서 이루도록 해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여기 네 명의 남자에 의해 실려 온 중풍환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순간, “I AM”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제 나를 용서하세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다는 확신을 함으로써 나 스스로를 용서하세요. 이렇게 나 스스로를 용서할 때 이 세상 어떤 것도 그 소망의 실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죄에 대해 말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지 마세요. 예수는 죄 지은 자를 용서하기 위해 왔습니다. 예수의 유일한 관심은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소위 말하는 도덕 따위는 잊어버리세요. 저는 여러분에게 죄에 대해 두려운 생각을 심어주는 사람들을 벌주라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잊어버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은 스스로 정리될 것입니다.
우리 인류는 무한한 상태 안에 존재합니다. 지금 저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그가 존재할 수 있는 무한한 상태 중 한 모습일 뿐, 그 상태가 그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가 어떤 상태에 머무르려고 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당신은 무엇이 되고 싶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그는 어떤 상태가 되고 싶다고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에게 그가 원하고, 되고 싶어 하는 상태를 물음으로써 그를 무한한 상태로 만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 원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있더라도 당신이 그 사람에 대해 대리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가 원하는 모습이 이루어진다면 그는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뭐, 어쨌든 그게 이루어지긴 이루어졌네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상태가 무엇인지 물어보세요. 만일 그들이 믿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대가 내가 그임을 믿지 않는다면
그대는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을 들으면서, “나는 하느님이고, 당신은 아니다”라는 뜻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인간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그가 우리에게 진리를 말합니다.
“그대는 진리를 알아야 하고 진리가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자유인인데 뭐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겁니까?”
사실 그들은 속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육체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그것이 자유라고 믿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자유일까요? 집세를 내지 못하고 음식도 살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자유롭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나는 죄를 용서함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고, 그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하느님, 즉 “I AM”입니다.
오늘 우리 세상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실업 상태이고 집세도 못 내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성서에 쓰인 대로, 하느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자유롭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면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이름과 나이를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존 스미스입니다. 나는 30살입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항상 “나는”이라는 말을 해야만 합니다. 그 “I AM”이 하느님입니다.
마태오 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제가 이 이야기를 전했을 때 청중 중에 한 여성분이 있었는데, 그녀의 동생은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6개월의 중형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저의 이 강의를 듣고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가 의자에 앉아, “만일 이 남자가 하는 말이 진실이라면 나는 내 동생을 풀어줄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면서 완벽한 상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완벽한 상상 속에서 그녀는 벨소리를 들었고, 계단을 내려가 현관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남동생을 안았습니다. 그녀는 이것을 일주일 동안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 일요일 아침 그녀가 제 강의에 오기 전에 이 일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저의 강의에 와서, 천 명이 넘는 청중 앞에서 자신의 체험을 생생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녀의 남동생은 재판에 회부되어 중형을 선고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명예제대를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 남동생이 어떤 일을 해서 어떤 선고를 받았든 간에, 그녀는 상상 속에서 동생을 원하는 모습으로 인식했고, 그 결과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만약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사람을 사랑스럽고 인정 많은 사람으로 보기로 결심한다면, 그는 내 세상에서 친절하고 자애로운 행동을 하게 될 것이고,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그는 이미 내 상상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는 외부 감각이 전해주던 상태에서 벗어나, 그가 이미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는 인식을 유지하며 그 상태에 머무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 능력을 바로 당신에게 주셨습니다. 당신은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이고 당신만이 죄를 용서하는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롭습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보다 더 자비로운 존재가 있을까요? 당신보다 더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존재가 있을까요? 아뇨. 없습니다.
당신만이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소름끼치도록 아름답지 않나요?
조금만 인식을 바꾸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당신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여러분이 직접 해보면 알겠지만 이 법칙에 절대 실패는 없습니다. 주의 기도에서 말하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듯이”라는 구절을 꼭 기억하세요.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우리는 외부에서 전해지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잘못된 일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든 곳에서 “죄를 짓지 말라”는 포스터들을 보지만 죄를 저지릅니다. 이제는 그러지 마세요.
당신이 어떤 것을 듣고 보든, 그것이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면 쳐다보지 마세요. 당신이 원하는 상태에 대해서만 말하고, 그 상태에 있다는 믿음을 유지하세요. 당신 자신을, 소망이 이미 이루어진 상태에서 행복해하고 있는 모습 속에 놓아두십시오. 이것이 바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이며, 지금까지 당신이 지은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꼭 해보세요. 당신은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합니다.
이제 침묵으로 들어가겠습니다.